고환차왜(告還差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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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주가 강호에서의 참근(參勤)을 마치고 대마도에 돌아온 사실을 조선에 알리는 일본 사신.

개설

임진왜란 후 일본과 국교를 회복·정립해 가는 과정 중에 양국 간에는 연이어 사신을 파견하는 등 외교 활동이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의 강호막부(江戶幕府)는 지방의 대명(大名)들을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1년마다 영지와 강호를 오가게 하였던 제도로서 참근교대(參勤交代)제도를 시행하였다. 고환차왜는 대마도주가 강호에서 돌아온 것을 조선에 알리기 위하여 파견하였던 사신으로, 1632년(인조 10) 귤성공(橘成供)이 건너온 이래 1863년(철종 14)까지 총 71회 도래하였다.

내용 및 특징

1632년(인조 10) 도주 평의성(平義成)이 강호로부터 대마도에 돌아온 후 그 사실을 알리는 차왜가 예조 참의에게 보내는 서계를 지참하고 왔으므로 접대를 허락하였다. 1719년(숙종 45)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접(引接)하여 고환차왜 등의 일을 논의하였다. 동래부사서명연(徐命淵)은 이전부터 도주(島主)가 새로 임무를 맡아 강호에 가서 조현(朝見)하고 돌아오면 반드시 고환차왜를 보내었으며, 이로부터 또한 사람을 보내어 보문(報問)하는 예(禮)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대마도에서 폐해를 끼친다고 핑계하고서 차왜를 보내지 않는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비록 한때의 폐해를 줄인다고 하지만 규례가 있기 때문에 폐지한다면 이후에 문제가 있을 것이므로 정지할 수 없다는 뜻으로 논의하였다(『숙종실록』 45년 5월 15일).

1809년(순조 9)에 문위행(問慰行)이 약조할 때 도주가 처음 환도(還島)하거나 두 번째 환도하면 첫 번째 차왜의 도래(渡來)를 허락하고 그 후부터는 단지 서계(書契)만을 세견선 편에 부쳐 보내도록 하였다.

1834년(순조 34)에 대마도주 의질(義質)의 아들 의장(義章)이 장군의 명령을 받아 통신사무(通信事務)를 익히기 위하여 환도한 후 고지차왜(告知差倭)가 도래하였다. 이전 1656년(효종 7) 당시 통신사를 데리고 돌아왔기 때문에 제1 특송선(特送船)의 예에 따라 접대를 허락한 적이 있었지만, 이때는 원역(員役)을 함부로 더하였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 『증정교린지(增訂交隣志)』
  • 심민정, 「조선 후기 일본사신 접대를 통해 본 朝日관계-差倭제도와 접대규정 변화를 중심으로-」, 『역사와 경계』 96, 경남사학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