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책(高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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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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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고책 |
한글표제 | 고책 |
한자표제 | 高策 |
관련어 | 도산(島山), 울산전투,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 |
분야 | 정치/군사·국방/전쟁 |
유형 | 인물 |
지역 | 중국 |
시대 | 명 |
집필자 | 한지선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호: 대정(對庭) |
성별 | 남 |
출신지 | 산서(山西) 천성위(天城衛) |
관력 | 참장(參將), 부총병(副總兵), 도독동지(都督同知)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고책(高策)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26년 1월 24일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나라 무장.
개설
호는 대정(對庭)으로 산서(山西) 천성위(天城衛)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 참전하였다. 평양전투 이후 평양성을 보수하였다. 1593년 9월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계병(薊兵) 2,500명을 이끌고 울산전투에도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1592년(선조 25) 12월에 유격(遊擊)의 지위로 대동(大同)의 기마병 2천을 거느리고 나왔다. 평양전투 이후 유격양심(梁心)과 함께 무너진 성을 수축하며 지켰다(『선조실록』 26년 1월 24일). 1593년 9월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형개(邢玠)를 따라 계병 2,500명을 거느리고 재차 왔다. 고책은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울산전투에 참여하였다.
현재의 울산 중구 학성공원에 해당하는 울산의 도산성은 성벽이 네 겹으로 쌓여 있고 아래에서 위를 공격하는 형세라 공격하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고책은 동문 쪽을 맡아 지켰으나 마침 구원을 위해 왜선들이 많이 정박하여 구원하려 하자 4일 포위를 풀고 철수하여 경주로 돌아왔다. 고책은 부대의 규율과 질서를 엄히 밝혔는데, 부하 군졸 가운데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죄를 주고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진영을 세운 곳에서는 더욱 쐐기를 박아 단속하였으므로 그가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편하게 여겼다.
본국에 돌아가 선부(宣府)·계진(薊鎭) 등지에서 참장(參將)·부총병(副總兵)을 지냈고 도독동지(都督同知)에 올랐다.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명사기사본말(明史紀史本末)』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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