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鼓匠)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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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고장 |
한글표제 | 고장 |
한자표제 | 鼓匠 |
상위어 | 경공장(京工匠) |
하위어 | 장고장(杖鼓匠), 절고장(節鼓匠) |
동의어 | 풍물장(風物匠) |
관련어 | 거모장(去毛匠), 악기장(樂器匠) |
분야 | 정치/행정/관속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장경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고장(鼓匠)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세조실록』 6년 8월 1일, 『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세조실록』 6년 8월 1일 |
한성부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북의 제조를 맡았던 장인.
개설
조선시대에 고장(鼓匠)은 장고를 만들던 장고장(杖鼓匠)이나 절고(節鼓)를 만들던 절고장(節鼓匠)으로 세분되었으며, 각종 타악기를 만들던 풍물장(風物匠)도 북을 만들던 장인이었다. 조선초기 세조 때까지 북은 군대의 진퇴를 알리는 데 중요한 수단이어서 고장은 군기감(軍器監)에 4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고장이 군기시에 4명 소속되어 있었으며, 16세기 초부터 활동 상황이 발견되지 않으나 1884년에 군기시가 폐지될 때까지 법전의 규정에는 존속되어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군사용 북보다 왕실 의례 시 정재용 북의 수요가 많아 장고장이 훈련도감이나 상의원에 소속되어 있다가 국가에서 필요한 북을 제작하였다. 1892년에는 장악원에 장고장과 풍물장이 소속되어 각종 연향용 북을 제작하였다.
담당 직무
북은 크게 군대용, 의례용, 불교용, 민속용의 네 가지로 구분된다. 이 중 경공장(京工匠)으로서 관장(官匠)으로 활동하거나 국가적 의례를 거행하기 위해 도감에 차출된 고장이 제작한 북은 군대용과 의례용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국가적 안위를 위해 군대에서는 진퇴를 알리는 신호로 사용하기 위해 다양한 북을 만들었다. 군사용이나 관아에서 조회를 하거나 행진을 할 때 사용하는 북들이 전하고 있다.
조선초기에는 병조 산하의 군기감에 고장 6명을 소속시켜 군대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북을 제작하였다(『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이렇게 군대용으로 사용하는 북의 수요가 늘어나자 세조대에는 군기감에 고장 15명을 소속시킴과 동시에 가죽에서 털을 뽑아 제거하는 거모장 15명까지 소속시키도록 하였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15세기에 들어 성종대에 사회가 안정되자 『경국대전』에 의하면 고장 4명을 군기시에 소속시켜 그 숫자가 줄어들었다.
둘째, 왕실의 권위와 안정을 대내외에 과시할 각종 왕실 의례와 연향을 장엄하게 하기 위한 각종 북은 풍물장이 만들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중앙 관서와 지방관청에서 징·꽹과리·장구·소고 등 악기를 만들던 장인, 풍물장이 상의원에 8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변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이 북 치는 법을 제정하였다 하며, 신라에는 대고(大鼓)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태묘에 제사를 지낼 때 좌고(座鼓)와 입고(立鼓)를 사용하여 음악을 연주하였다고 한다.
조선초기에 군기감의 장인은 7~8백여 명이었는데, 매월 부과된 업무[月課] 이외에 잡일이 많아서 장인들이 도망가 1434년에는 그 숫자가 3백여 명으로 줄어들어 인원수를 보충한 적이 있었다. 당시 고장은 6명으로서 그대로 두었다(『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그런데 세조 때에는 군기감의 고장과 거모장이 각각 15명씩이었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경국대전』에 의하면 중앙 관서와 지방관청에서 북을 만들던 장인은 풍물장이었다. 그들은 징·꽹과리·장구·소고 등 악기를 만들던 장인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각종 악기가 불에 타 장악원에서 풍물을 만들려 하였으나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하여 정지하였다[『선조실록』 34년 5월 14일]. 하지만 광해군대에 들어서면 풍물 조성이 가능하여 1608년 선조의 국장도감 때 이미 풍물장 한대춘(韓大春)이 장악원의 정6품 잡직인 전악(典樂)설윤향(薛允香)의 감조를 받아 제작하였다.
조선후기 도감에서는 고장·절고장·장고장·풍물장을 동원하여 각종 왕실 의식에 필요한 북을 제작하였다. 그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동원된 풍물장은 1608년 선조의 국장도감에서 풍물을 제작하였다.
첫째, 고장은 도감에 동원된 사례가 가장 적어 5번에 불과하다. 고장을 부른 도감은 존숭도감(尊崇都監)·제기악기도감(祭器樂器都監)·수작도감(酬酌都監)·천봉도감(遷奉都監) 등이었다.
둘째, 절고장은 1688년부터 1757년까지 12번의 국장도감(國葬都監)·시호도감(諡號都監)·천릉도감(遷陵都監)에 동원되었다. 이로 미루어 국장 때 행사용 절고를 만들어 수많은 군인들이 행진을 하거나 국장 의식을 장엄하게 하기 위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장고장은 15차례의 도감에 징발하였는데, 국장도감·예장도감(禮葬都監)·천릉도감에 가장 많이 동원되었고, 진연청·악기도감 등에서도 활동하였다.
넷째, 풍물장이 동원된 도감은 크게 국장도감과 진찬도감(進饌都監)·악기조성도감(樂器造成都監)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이들 풍물장은 시기에 따라 동원되는 숫자나 처지가 바뀌고 있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通考)』
- 김종태, 『중요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권190 북메우기』, 문화재관리국, 1991.
- 이종석·이보형, 『중요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권130 북메우기』, 문화재관리국, 1980.
-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0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