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군(高原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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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함경도 고원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고원군(高原郡)은 1413년(태종 13) 설치되어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강점기를 거쳐 북한 치하에서도 동일 지명, 동일 직급의 행정구역으로 기능하였다. 진관(鎭管) 체제 아래에서는 함흥진관(咸興鎭管)에 소속되어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의 영토로 덕녕진(德寧鎭)을 두었다고 한다. 진흥왕 때 신라의 영역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 973년(고려 광종 24)에 지금의 고원(高原)인 고주(高州)에 성을 쌓아 방어에 대비하였고, 995년(고려 성종 14)에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 원(元)나라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설치되어 그 지배를 받다가,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쌍성총관부를 폐지한 뒤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다.

조선이 건국한 뒤 1413년 10월 15일, 전국의 군현 가운데 ‘주(州)’ 자를 가진 고을을 모두 ‘산(山)’이나 ‘천(川)’ 자로 바꾸었다(『태종실록』 13년 10월 15일). 이때 고주는 이례적으로 ‘원(原)’ 자로 고쳐서 고원(高原)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만들었다.

조직 및 역할

군수(郡守)는 종4품으로 임기는 60개월이었다. 1623년(인조 1)에 전염병이 돌아 임기를 30개월로 바꾸었다가 1639년(인조 17)에 다시 60개월로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군수에 직속된 이속(吏屬)으로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4명, 아전(衙前)·지인(知印) 57명, 사령(使令) 23명, 군뢰(軍牢) 24명, 관노(官奴)·관비(官婢) 80명, 품관(品官) 192명, 유생(儒生) 244명, 토포병방(討捕兵房) 1명, 가솔(假率) 513명, 군기가솔(軍器假率) 91명, 병영가솔(兵營假率) 55명, 토포군관(討捕軍官) 12명, 봉무사(烽武士) 100명, 친기위(親騎衛) 57명, 아병가솔(牙兵假率) 90명, 포수(砲手) 10명, 교노(校奴)·교비(校婢) 13명, 역일수(驛日守) 16명, 궁인(弓人) 1명, 야장(冶匠) 3명, 병영가솔마정(兵營假率馬丁) 12명, 친기위보(親騎衛保) 99명이 있었다. 함흥진관 소속으로 군수가 병마동첨절제사를 겸하였다.

고원의 관할 행정구역으로는 『여지도서』에 6사(社)가 소개되어 있다. 신산사(薪山社), 상발산사(上鉢山社), 산곡사(山谷社), 군내사(郡內社), 수동사(水洞社), 하발산사(下鉢山社)가 있었다.

변천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가 대구역주의인 8도제에서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뀌면서 함흥부(咸興府) 소속의 고원군이 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이듬해 다시 전국을 13도 8부 1목 331군으로 개편할 때 고원군은 함경남도 소속이 되었다(『고종실록』 33년 8월 4일). 해방 이후 지금까지 고원군이 유지되고 있는데, 원산·안변 등이 강원도 관할로 바뀌면서 함경남도 최남단 행정구역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
  • 통일부, 『2004 북한개요』, 통일부,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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