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군(高陽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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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기도의 고양군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고양군(高陽郡)은 조선이 건국한 직후인 1394년(태조 3)에 고봉현(高峰縣)에 감무(監務)를 설치하고, 덕양(德陽)·부원(富原)·황조향(荒調鄕)을 고봉에 편입시켰다. 1413년(태종 13)에 고봉현과 덕양현 두 고을의 이름을 따서 고양으로 고치고,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1471년(성종 2)에는 군으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한성부 고양군이 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양군에는 1394년(태조 3)에 감무를 설치하였고, 1413년(태종 13)에 고양으로 이름을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1471년(성종 2)에 경릉(敬陵), 창릉(昌陵) 두 능이 있다는 이유로 고양군으로 승격되었다(『성종실록』 1년 10월 13일). 1504년(연산군 10)에 잠시 혁파된 적도 있지만 이를 제외한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군수(郡守)가 고양을 관할하였다.

조직 및 역할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고양현일 때는 종6품의 현감이 있었으나, 『경국대전』은 고양군으로 승격된 후 발간되었기 때문에 종4품의 군수와 종9품의 훈도 각 1명이 고양군에 소속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훈도는 지방 향교의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생원·진사 중에서 선택하여 임명하였는데, 후기에 모두 폐지하였다. 그래서 『여지도서』에는 고양군수 아래에 향소(鄕所) 3명, 군관(軍官) 7명, 아전(衙前) 30명이 두어졌다. 향소는 그 운영의 실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좌수(座首)와 별감(別監)을 지칭하는 것으로, 군에는 대개 3명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6방을 분장해서 좌수가 이·병방을, 좌별감이 호·예방을, 우별감이 형·공방을 맡아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임기는 지역별로 차이를 갖는데 대개 2년이었다.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고,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 등의 6방 업무를 맡았다.

변천

고양군은 1471년(성종 2)에 경릉과 창릉이 있다 하여 군으로 승격되었는데, 1504년(연산군 10)에 고을을 폐지하여 놀이터로 만들고, 나머지 지역은 나누어 이웃 고을에 소속시켰다. 다시 군이 복구된 것은 중종 초였고,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한성부 고양군이 되었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한성부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보유편(補遺篇)[경기도(京畿道)] 고양군여지승람(高陽郡與地勝覽)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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