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리보(高山里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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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북도 강계도호부에 속한 첨절제사진.

개설

고산리보는 평안북도 강계도호부에 속한 관방시설로 주변 지형이 험하여 세종대에는 벽성(壁城)의 형태로 존재했다. 1437년(세종 19) 6월 14일에는 구자만호(口子萬戶)를 두었다. 1442년(세종 24) 2~3월에는 고산리구자에 행성(行城)을 쌓았으며, 1482년(성종 13)에는 고산리진성을 쌓았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진성을 쌓으면서 첨절제사를 둔 것 같다.

위치 및 용도

고산리보는 강계도호부에 위치해 있다. 강계는 야인이 침입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국방상 요충지 중 하나였다. 그리고 강계의 요해처는 만포(滿浦)와 고산리(高山里) 두 곳이었다. 『여지도서』에는 고산리보가 관아의 서쪽 150리(약 59㎞)에 있다고 했는데, 현재에는 자강도 강계시에 속한다.

변천 및 현황

1432년(세종 14) 10월에는 평안도감사의 관문(關文)에 의해 고산리를 지키는 군인을 인근의 구자둔(口子屯)을 지키는 군인과 합쳐서 만포(萬浦)의 목책으로 들어가서 함께 지키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4년 10월 22일). 이때까지만 해도 고산리는 별도의 조직이나 방어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1437년(세종 19) 6월에 구자만호를 두었다(『세종실록』 19년 6월 14일). 1439년(세종 21) 3월 조정에서는 연변에 위치한 여러 구자(口子)를 점차 석성으로 쌓으려고 했다. 하지만 평안도도절제사이천(李蕆)은 여기에 반대하며 목책을 수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농사에 힘쓰게 할 것을 제안했다. 강계 지역은 만포(滿浦)와 고산리(高山里)가 만나는 강변 30리 거리에 위치한 정부인(鄭夫人) 터에 목책을 설치하기로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정부인 터에 석성을 쌓는 걸로 합의를 하였다(『세종실록』 21년 3월 19일).

연변에 위치한 고산리보에는 야인들이 자주 침입했다. 1439년(세종 21) 5월 24~25일에는 150여 명이 고산리구자 건너편에 모습을 보였으며, 8월에는 오랑개[吾郞介]의 기병(騎兵) 8명이 활과 화살을 차고 고산리 쪽 강가에 오기도 했다(『세종실록』 21년 6월 17일) (『세종실록』 21년 8월 16일).

1442년(세종 24) 2월 10일에는 평안도의 정부(丁夫) 300명과 황해도의 정부 2,000명을 보내어 고산리 구자에 행성(行城)을 쌓기 시작했다. 이때 한 달여에 걸쳐 쌓은 성의 길이는 12,619척(약 3.8㎞)이었다(『세종실록』 24년 3월 10일).

1448년(세종 30) 8월에는 세종이 평안도감사에게 남도에서 부방하는 군사의 수를 조정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불정동(佛丁洞) 방어소에 배정되어 있던 남도 부방군인 갑사(甲士) 15명 중 8명이 고산리 구자(高山里口子)로 옮기게 되었다(『세종실록』 32년 1월 18일).

1450년(세종 32) 평안도도절제사김종서(金宗瑞)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만 하더라도 고산리보는 석성이 아니라 벽성(壁城)으로 축성되었다. 고산리보의 지형이 높고 험하여 대규모의 적군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지역 농민들이 혹시 좀도둑의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조정의 걱정도 작용했다(『세종실록』 32년 1월 18일).

1450년(문종 즉위)에는 김종서가 고산리에 석성을 쌓아야 야인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다고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의정부와 병조에서는 점차 석성으로 쌓자고 의결하였고, 문종 역시 이에 동의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8월 7일).

1466년(세조 12) 2월에는 도체찰사한명회가 종사관이수남(李壽男)을 보내어 고산리성의 높이가 7~8척(약 2m)으로 낮기 때문에 12척(약 3.6m)을 더 쌓고, 무너진 행성(行城)도 점차 수축할 것을 보고하였다(『세조실록』 12년 2월 3일).

1475년(성종 6) 5월에는 나졸 박양지(朴陽枝) 등 10명이 강을 건너 정찰하다가 야인들에게 잡혀가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성종실록』 6년 5월 29일). 이들 중 갑사 최영산(崔永山)은 8월 9일에 도망쳐 돌아왔다(『성종실록』 6년 8월 16일). 야인들의 출몰은 계속되었는데, 1476년(성종 7)에도 야인 10여 명이 고산리 강 밖에서 사냥하면서 틈을 엿보았다고 한다(『성종실록』 7년 9월 3일).

1482년(성종 13)에는 고산리진성을 쌓았다(『성종실록』 13년 9월 30일). 동시에 만호진이던 고산리보는 첨절제사를 둔 것 같다. 1490년(성종 21) 5월에는 첨절제사양관(梁瓘)의 이름이 확인되기 때문이다(『성종실록』 21년 5월 14일).

1491년(성종 22) 8월 21일에는 야인 200여 명이 고산리성을 포위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적의 머리 39급(級)을 베는 등 크게 승리하였다(『성종실록』 22년 8월 29일)(『성종실록』 22년 8월 29일). 성종 역시 고산리에서의 승전을 매우 기뻐했으며, 공을 치하하였다(『성종실록』 22년 10월 12일). 같은 해 10월 서북면도원수가 고산리의 군공을 올렸는데, 1등에는 유호(兪顥) 등 124명, 2등에는 유중성(劉仲誠) 등 84명, 3등에는 김신동(金信仝) 등 71명, 4등에는 성첩(城堞)을 지킨 김외동(金外同) 등 149명이었다(『성종실록』 22년 10월 12일). 대체로 이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 같다. 같은 달 16일에 최종적으로 그들의 군공이 정해졌다. 성종은 1등은 3자급(資級), 2등은 2자급, 3등은 1자급을 더해주고, 정탐꾼은 2등의 예로, 성벽을 지킨 사람은 3등의 예로 할 것이며, 성첩을 지킨 사람이 천구(賤口)이면 면포(綿布) 8필(匹)을 지급하라고 명했다(『성종실록』 22년 10월 16일). 군공이 정해진 이후 여러 신하로부터 포상이 지나치게 크다는 지적이 제기되었으나, 성종은 그때마다 윤허하지 않았다. 성종이 고산리전투의 승리를 얼마나 기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503년(연산 9) 6월에는 실제로 기주위(岐州衛) 소속의 야인들이 고산리보에 침입하여 도둑질을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때 조선 측에서는 야인 4명을 죽이고 사을두(沙乙豆)라는 자를 생포하기도 했다(『연산군일기』 9년 6월 7일).

1732년(영조 8) 무렵에 오면 강계 지역의 큰 폐단으로 국경을 넘어오는 범월과 불법으로 장사를 하는 잠상이 지적된다. 잠상의 근거지 중 하나가 고산리진이었는데, 영조는 절제사로 하여금 날마다 살펴서 금지하도록 명하였다(『영조실록』 8년 2월 8일). 하지만 범월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이를 적발한 자는 포상을 받았고, 관리가 허술한 자는 처벌을 받았다.

형태

1442년(세종 24)에는 고산리 구자에 행성을 쌓았는데, 성의 길이는 12,619척(약 3.8㎞)이었다. 1482년(성종 13)에는 고산리진성을 쌓았는데, 높이는 8척(약 2.4m)이고 둘레는 2,145척(약 650m)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산리보는 강계도호부의 서쪽 125리(약 49㎞)에 있으며, 석성으로 둘레가 1,106척(약 335m)이고 높이는 4척(약 1.2m)이라고 했다. 병마첨절제사영이 있으며 성안에는 군창이 있다. 참고로 정약용의 『대동수경』에는 고산리보가 강계의 서쪽 150리에 있으며, 성의 둘레는 1,106척이라고 되어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수경(大東水經)』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