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성(高沙里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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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강계진관에 속한 첨절제사진.

개설

고사리성은 평안도 강계의 압록강 연변에 설치한 관방시설로 세종대에 처음 설치되었다. 고사리는 고산리(高山里)의 이칭(異稱)이기도 하다. 세종대에 구자만호(口子萬戶)를 설치한 뒤, 성종대에 이곳의 만호를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승격시키며 병마첨절제사진이 되었다. 지리적으로 건주여진(建州女眞)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방어와 공격의 요충지였다.

자연환경

고사리성은 현재 북한 자강군 만포시에 속하였다. 이곳의 동북쪽은 자성군, 동남쪽은 장강군과 시중군에 접하였다. 남쪽은 위원군과 접하고 있으며 북서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마주하고 있었다. 지형은 북동부가 높고, 서쪽으로 가면서 점차 낮아졌다. 대부분 지역이 저산성 산지로 되어 있었다. 시가지를 비롯하여 규모가 큰 취락은 대부분 압록강 유역에 입지하였다.

위치 비정

현재 자강도 만포시 고산면 고산리이다.

변천 및 현황

조선은 건주여진 등으로부터 압록강 연변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사 방어 진지인 구자(口子)를 설치하였다. 고사리는 그중 하나로 강계부에 소속되었다. 고사리에 처음 구자를 설치한 것은 최소한 1432년(세종 14) 10월 이전으로 보인다. 즉,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관문(關文)을 통하여 고산리구자(高山里口子)의 군인을 만포(萬浦)의 목책으로 들어가서 함께 지키도록 한 내용을 통하여 알 수 있었다(『세종실록』 14년 10월 22일). 이후 1437년(세종 19) 6월에 구자만호(口子萬戶)를 새로 설치하였다(『세종실록』 19년 6월 14일).

고사리는 1437년과 1468년(세조 14)의 건주여진 정벌에 출발 혹은 경유지였고, 반대로 건주여진이 조선을 공격하는 주요 지점일 정도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러므로 조선은 고사리에 행성(行城) 등 방어 시설을 설치하였고, 건주여진의 정보를 수집하는 최일선이었다. 이후 1479년(성종 10)에 명의 요청에 따라 건주여진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이곳의 만호를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승격시켰다.

한편, 고사리성은 1491년(성종 22) 8월에 건주여진의 습격으로부터 큰 승전을 거둔 곳이기도 하였다. 이때 적 200여 명이 고산리성을 포위하였으나 조선군은 여진인 39급을 베었고, 적들 중에 익사한 자와 화살에 상하여 죽은 자도 80여 명에 이르렀다(『성종실록』 22년 9월 4일). 이때의 전투는 1479년 건주여진 정벌에서 조선군이 거둔 전과보다 더 많았다. 따라서 『국조정토록』에도 기록되었을 만큼, 조선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전투이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건주여진이 고사리를 여러 차례 공격하였고, 청(淸)이 건국할 때까지 고사리는 중요한 요충지로 작용하였다. 청 건국 이후 압록강 지역에 비교적 안정적인 관계가 구축되며 조선전기에 비해 중요성이 약화되었다. 한편, 청나라 사람이 인삼의 채취 등을 위하여 조선의 국경에 넘어오는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한 방수(防守) 등이 주요 업무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형태

고사리성은 강계부에서 서쪽으로 125리(약 49㎞) 이상 떨어진 압록강변에 설치되었다. 이곳은 처음에 목책(木柵)의 형태였다가, 1442년(세종 24년)에 길이가 12,619척(약 3,824m)의 행성(行城)으로 바뀌었다. 이후 1482년(성종 13)에 높이 8척(약 2.4m), 둘레 2,145척(650m)의 고산리진성(高山里鎭城)을 돌로 쌓았다(『성종실록』 13년 9월 30일).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 1,106척(약 335m), 높이 4척(약 1m)으로 차이가 있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국조정토록(國朝征討錄)』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국조보감(國朝寶鑑)』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북한편)』 2,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2013.
  • 박정민, 「15세기 후반 건주여진의 생존전략」, 『명청사연구』 44, 2015.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2002.
  • 이규철, 「조선초기의 對外征伐과 對明意識」, 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