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진보(古文眞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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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나라 말기의 학자 황견(黃堅)이 편찬한 시문선집.

개설

이 책은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송(宋)나라 때까지의 고시(古詩)ㆍ고문(古文) 가운데 중요한 편들을 모아 엮은 책으로, 전집(前集) 10권, 후집(後集)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문진보』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경위는 자세하지 않다. 고려 말엽의 문신 전녹생(田祿生)이 중국에서 『고문진보』를 구입하고 산증(刪增)을 가하여, 합포(合浦)에서 처음 간행했다는 기록이 『야은일고(野隱逸稿)』에 전한다. 이를 통해 이미 『고문진보』가 14세기에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편찬/발간 경위

편찬자인 황견(黃堅)과 편찬 경위 등에 대하여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적으로 송나라 말기에서 원(元)나라 초기에 걸쳐 편찬된 것은 분명하다. 1366년(至正 26) 정본(鄭本)의 서문의 내용에 따르면, 이미 당시에 주석이 있었고 오랫동안 세상에 보급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1420년(세종 2) 옥천에서 『선본대자제유전해(善本大字諸儒箋解)』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1452년(문종 2)에는 『상설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이라는 제목으로 동활자인 경오자(庚午字)로 간행되었고, 복간을 거듭하여, 이 대본이 널리 유포되어 사용되었다. 이후 언해본과 현토본이 간행되어 지금까지 전한다.

서지 사항

총 20권 10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오자본(庚午字本)이다. 규장각,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여러 간본(刊本)들이 있으며, 이들 사이에는 내용과 편수에서 차이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활자본으로는 1949년에 나온 덕흥서림본(德興書林本)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의 전집은 ‘권학문(勸學文)’ 등 소박하고 고아한 시를 주로 수록하였고, 후집은 산문으로 된 17체의 명문을 실었다.

전집 10권의 구성은 권1ㆍ2에 오언고풍단편, 권3에 오언고풍장편, 권4ㆍ5에 칠언고풍단편, 권6에 칠언고풍장편, 권7에 장단구, 권8에 가류(歌類), 권9에 행류(行類), 권10에 음(吟)ㆍ인(引)ㆍ곡류(曲類)로 이루어져 있다.

후집 10권의 구성은 권1에 사(辭)ㆍ부류(賦類), 권2에 설(說)ㆍ해류(解類), 권3에 서류(序類), 권4에 기류(記類), 권5에 잠(箴)ㆍ명류(銘類), 권6에 송(頌)ㆍ전류(傳類), 권7에 비(碑)ㆍ변류(辨類), 권8에 표류(表類), 권9에 원(原)ㆍ논류(論類), 권10에 서류(書類)로 이루어져 있다.

『고문진보』는 간행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산증이 더해졌고, 그 결과 부피와 체재에 약간의 변모가 나타났다. 첫째는 책의 부피이다. 중국이나 일본에 많이 알려진 병오본(1366)은 시(詩) 217수, 문(文) 67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홍치본(弘治本, 1502)은 시 245수, 문 6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에 비해 조선의 『상설고문진보』는 시 240수, 문 13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는 체재이다. 후집에 국한되지만, 홍치본은 대체로 문형별로 편찬되었으나 『상설고문진보』는 역대 순으로 편집되었다.

이런 차이를 미루어보면, 조선은 시보다는 산문을, 문체보다는 역대로 변화해 가는 문장의 품격을 개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책은 당송팔가(唐宋八家)의 문장을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성격에 있어서는 『당송팔가문』과 다르다는 점도 특색이다. 『당송팔가문』에서는 이른바 ‘고문체’만을 수록하고 있는 반면, 『고문진보』는 고문체와 성격이 전혀 다른 「북산이문(北山移文)」과 「등왕각서(滕王閣序)」와 같은 변려문이 실려 있고, 「이소경(離騷經)」과 같은 초사도 포함하고 있다. 또 전집은 시가를 고문이라는 표제 아래에 두고 있다. 종합해보면 책명에 보이는 ‘고문’은 문체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고대의 글’이라는 뜻에 가깝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고려 말에 수입된 이래 조선시대 서당에서 아동용교과서로 활용되었으며, 특히 고문의 연변(演變)과 체법(體法)을 익히는 데 중요한 교재가 되었다. 『어우야담』에는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들의 배움은 대개 『십구사략』ㆍ『고문진보』를 익히는 것으로 학문에 들어서는 문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허균은 『성소부부고』에서 “권필(權韠)과 이안눌(李安訥)은 『고문진보』를 읽지 않았지만, 그 시는 좋다.”고 하여, 문장학습서로서의 『고문진보』가 지닌 효용성에 대하여 인정하고 있으며, ‘성옹식소록하(惺翁識小錄下)’에서는 “국초의 제공이 모두 『고문진보』 전ㆍ후집을 읽어 문장을 지었으므로, 지금의 인사들이 처음 배울 때 이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또 김륭(金隆)의 『물암집(勿巖集)』에 보이는 ‘고문진보전후집강록(古文眞寶前後集講錄)’, 정자신(鄭子信)의 『매창집(梅窓集)』에 보이는 ‘고문진보전후집주석정오(古文眞寶前後集註釋正誤)’ 등의 자료는 『고문진보』가 당시 교과서 역할을 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유몽인(柳夢寅)이 “내가 세 번이나 중국에 갔으나, 이른바 『고문진보』ㆍ『십팔사략』은 중국에서 매우 드물었다.”라고 한 기록과 허균(許筠)이 “『고문진보』는 한 사람이 우연히 모아놓은 것이라서, 그 취사가 확실하지 않으니, 읽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한 기록은 당시 『고문진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또 조계찬은 허균의 『성소부부고』에서 “중국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글이 중국과 대등하게 됨을 꺼려하였다. 그래서 『십팔사략』과 『고문진보』 두 책을 지어, 우리나라에 보냈다. 그런데 이 책이 온 뒤에 우리나라의 문장이 누추해져서, 옛 것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오산설림(五山說林)』에서도 이백(李白)이 한형주(韓荊州)에게 올린 글의 ‘청평(靑萍)’ㆍ‘결록(結綠)’에 대한 『고문진보』의 주가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러한 『고문진보』에 대한 비판은 조선 후기에 일반화된 현상으로 보인다.

이 책은 중국인이 중국인의 글을 모은 것이라는 한계성 때문에 비판적 견해가 있다. 그러나 변문을 억제하고 고문을 숭상하던 기조에 따라, 초학들이 널리 익힌 교재 가운데 하나였다. 또 중국의 판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에게 알맞게 산증 되었다는 점과 각종 주석, 언해본ㆍ현토본 등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책이 조선시대의 문장 학습용 도서로서, 널리 수용되었음을 알려준다.

참고문헌

  • 강찬수, 「『고문진보』의 편찬과 그 유전(流轉) 양상」, 『중국문학연구』 제33집, 한국중문학회, 2006.
  • 강찬수, 「국내 『고문진보(古文眞寶)』의 연구 개황과 문제점 –간행(刊行), 수용(受容), 전파(傳播)와 그 연구(硏究)」, 『중국어문논총』 39권, 중국어문연구회, 2008.
  • 공정보, 「한유(韓愈) 산문 분석: 『고문진보』를 중심으로」, 경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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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가건, 『古文觀止ㆍ續古文觀止鑑賞辭典』, 同濟大學出版社, 1990.
  • 박삼수, 「試論韓國版古文眞寶」, 『長春師範學院學報』 20卷, 長春師範學院, 2001.
  • 박한규, 「계문(溪門)의 『고문진보』 전집 독법 시론」, 『퇴계학논집』 제3호, 퇴계학연구원,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