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진(高嶺鎭)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함경북도 회령부에 속한 첨절제사진.

개설

고령진은 함경북도 회령부에 속한 관방시설로 회령과 종성의 방원보(防垣堡) 사이에 위치한다. 세종대에 죽보만호(竹堡萬戶)를 설치한 것에서 기원한다. 세종대에 강가로 옮기고 병마만호를 두었다가 1450년(세종 32)에 첨절제사로 승격하여 고령진이 되었다.

위치 및 용도

고령진은 조선시대에는 회령부(會寧府)에 속해 있었다. 현재의 함경북도 회령시 인계리 고령진역 일대로 보인다. 남쪽으로 회령진과 21리(약 8.2㎞) 떨어져 있으며, 보을하진(甫乙下鎭)과는 46리(약 18㎞), 풍산보(豐山堡)와는 71리(약 27.8㎞) 떨어져 있다. 북쪽으로는 세천보(細川堡)와의 거리가 45리(약 17.7㎞)이고, 방원보(防垣堡)와도 45리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 45리를 가면 행영(行營)에 도달한다.

변천 및 현황

본래 고령진은 1441년(세종 23)에 처음 죽보만호를 설치하였다가 곧바로 강가의 금산(禁山) 아래로 옮기고 병마만호로 삼았다. 1450년(세종 32)에는 만호노옥곤(盧玉坤)이 성을 고쳐 쌓고, 당상관(堂上官)에 올라 고령진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1464년(세조 10) 병조에서는 도체찰사한명회(韓明澮)의 계본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즉, 함흥부(咸興府)는 근래에 군사적 위협이 없기 때문에 도진무(都鎭撫)는 더 이상 군량미를 허비하지 말고, 훈융진(訓戎鎭)·동관진(童關鎭)·고령진의 여러 진(鎭)에 군관(軍官) 3명을 거느리고 가서 근무를 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10년 7월 10일).

세조대에는 북방 야인의 침략 시도가 있었다. 1465년(세조 11)에는 고령진의 밑에 살던 알타리(斡朶里) 중추(中樞) 이가홍(李家紅)이 나와서 자신의 부족민이 니마거 올적합(尼麻車兀狄哈)에 잡혀갔다 도망쳐왔다는 정세를 보고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11년 10월 9일). 알타리는 고령진 밖에 거주하며 조선의 보호를 받으면서 적정을 정탐하고 보고해주는 역할을 했던 성저야인(城底野人)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466년(세조 12)에는 고령진절제사어득회(魚得淮)가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사냥을 하다가 갑자기 야인(野人)을 만나 조선 측 군사가 많이 죽고 사로잡힌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 일을 어득회가 거짓으로 보고했으나, 결국 들통이 나서 종성(鍾城)에 갇혔다. 하지만 고령진은 요해처여서 비워둘 수 없었기 때문에, 사직(司直)강흥손(康興孫)으로 하여금 고령진을 임시로 관리(管理)하게 하였다(『세조실록』 12년 6월 29일).

1469년(예종 1) 4월에도 알타리가 와서 올량합이 중국을 침공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예종은 평안동서도절도사에게 유시(諭示)하여 사신(使臣)이 돌아올 때 약탈당할 수 있으니 정예병을 더 보충하도록 명하였다(『예종실록』 1년 4월 22일). 이렇듯 알타리족은 꾸준하게 올량합족의 동향을 조선에 보고하였다. 올량합족의 알타리족에 대한 반감은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472년(성종 3) 6월 결국, 올량합이 고령진 아래에 살고 있던 알타리족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정보가 조선에 전해졌다. 이에 성종은 영안북도(현 함경북도) 절도사 선형(宣炯)에게 올량합을 잘 달래라고 주문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3년 6월 8일).

고령진성은 1479년(성종 10) 11월 30일에 축조하였으며(『성종실록』 10년 11월 30일), 다음 해인 1480년(성종 11)에는 고령진에 장성(長城)을 쌓았다(『성종실록』 11년 10월 28일). 하지만 이때 장성을 쌓으면서 알타리족의 경작지 일부가 성터로 들어가 버린 것으로 보인다. 1486년(성종 17)에 알타리족은 자신들의 전지(田地)를 보상해주지 않아 빈곤을 견딜 수 없다고 항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 진위를 절도사로 하여금 제대로 파악하게 함과 동시에 그들을 잘 타이르도록 하였다(『성종실록』 17년 8월 1일).

성종대에 고령진은 진에 속한 군졸은 그 호수(戶首)는 고령을 방어하고, 군무를 돕기 위해 딸려온 장정인 솔정(率丁)은 회령에 가서 역사(役使)를 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실정을 영안도(현 함경도) 경차관으로 간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정성근(鄭誠謹)이 와서 보고하였다. 이로 인해 고령진에 속한 솔정은 공부(貢賦) 이외에는 회령에서 시키는 잡역에서 제외하자고 건의하였다. 당시의 논의에 따르면 이 문제는 변방 백성의 이해관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해당 도의 관찰사 및 절도사로 하여금 의논한 후에 다시 이야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성종실록』 17년 2월 22일).

형태

고령진성은 1479년(성종 10) 11월 30일에 축조하였는데, 높이는 15척(약 4.5m)이고, 둘레는 6,270척(약 1,900m)이었다(『성종실록』 10년 11월 30일). 다음 해인 1480년(성종 11)에는 고령진에 장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10척(약 3m)이고, 둘레가 8,805척(약 2,668m)이었다(『성종실록』 11년 10월 28일).

『여지도서』에는 선조대에 첨사(僉使)이백복(李百福)이 바깥에 토성(土城)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2,780척(약 842m)이라 하였고, 높이가 6척(약 1.8m)이라 하였다. 행성(行城) 밖에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영(營)이 있다고 하였다.

『제승방략』에 전하는 고령진성의 둘레는 6,207척(약 1,880m)이다. 여장(女墻)이 185곳이고, 옹성(甕城)이 4곳, 곡성(曲城)이 8곳이라고 한다. 4개의 문이 동서남북으로 나 있으며, 천정(泉井)도 4곳이라고 하였다.

『여지도서』에는 1679년(숙종 5)에 고령진성을 개축한 것으로 되어 있다. 체성(體城)의 둘레는 3,700척(약 1,121m)이고, 높이는 8척(약 2.4m)이다. 여장은 205타(垜), 치성(雉城) 4곳, 옹성 4곳, 포루(砲樓) 20개, 우물이 25개, 연못이 1개 있다고 한다. 해자(垓子)의 둘레는 4,880척(약 1,479m), 깊이는 10척(약 3m)이다.

고령진에는 남쪽에 죽보봉수(竹堡烽燧), 북쪽으로는 북봉봉수(北峯烽燧)와 하을포봉수(下乙浦烽燧)가 잇닿아 있어서 통신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령진에는 남문외발소(南門外撥所)라는 발참(撥站)이 있었는데 발장이 6명, 발졸이 339명 속해 있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제승방략(制勝方略)』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