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득종(高得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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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88년(우왕 14)∼1452년(문종 2) = 65세.] 조선 전기 태종~세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한성부 윤(尹)이다. 자(字)는 자전(子傳)이고, 호(號)는 영곡(靈谷)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아버지는 상호군(上護軍)고봉지(高鳳智)이다.

태종 시대 활동

1413년(태종 13) 효행으로 천거 받아 음직으로 직장(直長)이 되었다.

1414년(태종 14) 알성(謁聖) 문과의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문과방목>]

1417년(태종 17) 성균관 주부(注簿)가 되었다.

세종 시대 활동

세종 즉위 후, 예조 정랑(正郞)⋅대호군(大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세종 9)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문과방목>]

1435년(세종 17) 예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1438년(세종 20) 호조 참의(參議)로서 관압사(管押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438년(세종 20) 중추원 첨지사(僉知事)로서 통신사(通信使)로 파견되어 일본 왕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왔다.

1441년(세종 23)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이때 고득종은 국가에서 명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예부 상서(尙書)호영(胡濚)에게 국왕의 병 때문이라며 정문(呈文)을 올려 약재를 청하고, 여진족 추장인 이만주(李滿柱)가 사로잡아간 사람을 돌려보내기를 청하였다는 이유로 귀국 즉시 체포되어 강음현(江陰縣)에 유배되었다.

1445년(세종 27) 석방된 후, 그해 중추원 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다.

1448년(세종 30) 바닷길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도전운사(都轉運使)에 임명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의 쌀을 평안도로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이어 한성부 윤(尹)에 임명되었다.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다. 그러나 저술이나 작품이 전하는 것은 없고,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몇 편의 시가 전해진다.

후손

슬하에 4남을 두었다. 장남은 한성부 좌윤(左尹)을 지낸 고태필(高台弼)이고, 차남은 고태정(高台鼎)이다. 3남은 남부녹사(南部錄事)를 지낸 고태보(高台輔)이며, 4남은 고태익(高台翼)이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겸재집(謙齋集)』
  • 『경재유고(敬齋遺稿)』
  • 『경재집(敬齋集)』
  •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 『무릉잡고(武陵雜稿)』
  • 『무송헌집(撫松軒集)』
  • 『보한재집(保閑齋集)』
  • 『사가집(四佳集)』
  • 『삼탄집(三灘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신고령봉사시작(申高靈奉使時作)』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용주유고(龍洲遺稿)』
  • 『우암집(寓庵集)』
  • 『전고대방(典故大方)』
  • 『지산집(志山集)』
  • 『해동역사(海東繹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