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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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강희제대에 시작되어 옹정제대에 완성된 중국 최대 규모의 백과전서식 유서.

개설

『고금도서집성』은 청의 4대 황제인 강희제의 칙령으로 완성된 10,000권 규모의 백과전서식 유서로,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유서이다. 『고금도서집성』은 강희제 자신의 호학(好學)의 성향을 바탕으로, 명의 유민인 한족(漢族)의 회유를 위한 문화 통치의 일환으로 간행되었다. 원래 제목은 ‘고금도서휘편(古今圖書匯編)’으로 초고는 1706년(청 강희 45)에 진몽뢰(陳夢雷)에 의해 완성되었고 이후 1726년(청 옹정 4)에 『고금도서집성』으로 간행되었다. 10,000권, 약 160,000,000자 5,020책으로 구성된 거질이지만 대부분의 글은 강희제의 셋째 아들 윤지(允祉)의 신하 진몽뢰가 편집하였다. 즉위 초부터 적극적으로 중국 책을 수입하고자 했던 정조는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 소식을 듣고 이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 실패하였고, 결국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갔던 서호수(徐浩修)가 1777년(정조 1)에 북경에서 『사고전서』의 저본이라 할 수 있는『고금도서집성』 전질 5,020권을 은자 2,150냥에 구입해 왔다(『정조실록』 1년 2월 24일).

서지사항

전체 10,000권, 6,000여 책, 160,000,000자, 6,400여 개의 삽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목록만 40권에 이른다. 1726년에서 1728년에 걸쳐 동활자로 64부를 인쇄하였으나 현재는 북경 국가도서관과 대만 고궁박물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지에 10여 부만 현존한다.

편찬경위

강희제의 셋째 아들 윤지를 모시던 신하였던 진몽뢰가 주군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유서 편찬 사업을 제안했고 강희제가 이를 승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1682년(청 강희 21) 진몽뢰가 유배되면서 작업이 중단되었다가 1698년에 다시 귀환하여 1706년 4월에 『고금도서휘편』이라는 명칭으로 완성하였다. 당시에는 인쇄되지 않았으나 강희제 서거 후 옹정제가 즉위한 뒤 장정석(蔣廷錫) 등이 『고금도서휘편』을 바탕으로 재편하였고 최종적으로 1726년에 『고금도서집성』으로 완성되었다.

구성 및 내용

방대한 규모에도 상당히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분류에 해당하는 휘편은 총 6개로 천문(天文)에 관한 ‘역상휘편(曆象彙篇)’, 지리·풍속에 관한 ‘방여휘편(方輿彙篇)’, 제왕·백관의 기록인 ‘명륜휘편(明倫彙篇)’, 의학·종교 등에 관한 ‘박물휘편(博物彙篇)’, 학술에 관한 ‘이학휘편(理學彙篇)’, 예술과 군사 등에 관한 ‘경제휘편(經濟彙篇)’ 등이다. 그 아래 중분류에 해당하는 32개의 전(典)과 소항목에 해당하는 6,117개의 부(部)로 이루어져 있다. 각 부는 자료의 성격에 따라 휘고(彙考), 총론(總論), 도(圖) 또는 도결(圖缺), 표(表), 열전(列傳), 예문(藝文), 선구(選句), 기사(紀事), 잡록(雜錄), 외편(外編) 등의 해설이 붙는다.

참고문헌

  • 고인덕, 「도설백과사전으로서의 『고금도서집성』-청대 전기의 문자정책과 삽화」, 『외국학연구』제27집, 2014.
  • 류향춘, 「강희 말년의 학술과 『고금도서집성』」, 『한국문화』57집,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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