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해반정록(癸亥反正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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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조반정의 전말을 적은 작자· 연대 미상의 역사 기록물이다.

개설

이 책은 인조반정의 전말을 적은 것으로 작자·연대는 미상이다. 이 작품은 작자는 서로 달라도, 『계축일기(癸丑日記)』의 후편이라 볼 수 있다. 한글체 필사본으로 한문본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다. 1972년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되었다. 책의 내용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소개로부터 시작하여 선조가 죽을 때 일곱 대신에게 내린 유교의 내용을 밝히고, 광해군의 즉위, 폐모대론(廢母大論), 대비의 서궁유폐, 인조반정의 전조(前兆), 반정의 진상, 반정 후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으로 엮어져 있다.

『계해반정록(癸亥反正錄)』은 폐모 논의 때에 신하들의 상소비답(上疏批答)에 있어, 실록대로 비교적 공정한 입장을 취하였으며, 마음 약한 광해군의 모습을 묘사하여, 오히려 동정적인 면도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 결구에 있어서도 『계축일기』는 영창대군의 끌려 나가는 장면이 절정을 이루므로, 광해군 초부터 시작되는 대비 편에 대해 박해의 실상에 역점을 두었고, 『계해반정록』은 인조반정의 실기에 약간의 일화를 삽입한 정도의 공적(公的) 기록 같은 인상을 주는 점에서 실기문학(實記文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흔히 『계축일기(癸丑日記)』의 속편 격으로 평가하고 있다. 『계축일기』가 인목대비의 유폐생활을 현미경처럼 그린 작품이라면, 이 책은 인목대비의 생애를 거시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작품도 인목대비의 편에서 인조반정의 원인·과정·결과를 차례대로 기술하고 있다.

편찬/발간 경위

인조반정의 전말을 적은 기록으로 작자·연대는 미상으로 한글 필사본이며, 한문본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다. 인조반정은 1623년(광해군 15)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세운 정변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후 대북파를 기용하여, 개혁적인 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나 적자가 아니었던 광해군은 형제들을 죽이고, 대비를 유폐하였고, 오랑캐라고 할 수 있는 후금(後金)과 명(明)에 균형외교를 유지하여, 중화사상에 물든 서인들의 불만이 컸다.

서인세력은 사림을 규합해,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왕위에 올리기로 하고, 반정을 일으켰다. 당시 훈련대장이흥립이 성문을 열어, 반군을 맞아들여 반정은 쉽게 성공했다. 반정세력은 인목대비를 복권하고,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다. 또한 집권했던 대북파들을 처형하고, 자신들은 정사공신이 되었다.

서지 사항

1책 52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작품의 원 제목은 『계해반정록』이다. 작가와 창작연대는 미상인데, 인목대비인 연안김씨의 후손이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서지 사항은 국문 필사본으로, 총 52장이다.

1608년(선조 41) 2월 선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이이첨과 최유년 등 신하들의 말에 따라, 유영경과 이덕형·김제남 같은 선조조의 중신들을 몰아내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켜 죽인다. 또 광해군의 신하들은 인목대비의 폐출을 주장하여 서궁(명례궁)에 유폐시킨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로써 조정에 남은 신하는 다 광해군 일파, 곧 대북파 일색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류와 이귀·장유·최명길·김자점·이괄 등 서인 일파는 몰래 반정을 준비하면서, 우선 능양군(인조)을 새 임금으로 추대한다. 마침내 거사일이 되자, 서인 일파는 홍제원에 집결한 뒤, 밤 이경(二更: 9시∼11시)에 행군하여, 창의문을 부수고 성안으로 들어가, 육조 앞에 집결한다. 이 때 장유의 일가친척이자 훈련대장이홍립도 가세하여, 훈련도감 병사 6천 명을 거느리고, 창덕궁으로 진격하니, 밤은 삼경(三更: 11시∼1시)에 이르렀다.

인조는 반정에 성공하자마자, 무엇보다 먼저 인목대비를 찾아가, 문안을 드린다. 또한 새 임금으로 등극한 후에도 직접 서궁의 인목대비를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수레와 의상을 갖추어 창덕궁으로 모셔온다.

이후 인조는 이이첨·유희분·정인홍 등 광해군 일파를 잡아다가, 종로 한 가운데에서 진을 치고, 백관을 동서로 나누어 서게 한 뒤에 정사를 어지럽힌 죄로 일시에 처단한다. 당시 죽은 사람은 65명이었고, 옥에 갇힌 이는 280여 명이었다. 그리고 함께 목을 매어 죽은 광해군의 왕비 박씨와 동궁을 양주 수락산 동쪽에 묻는다. 광해군도 역시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가, 1641년(인조 19) 7월 1일에 죽었으니, 나이가 67세였다. 한편 인조는 김류·이귀·최명길·장유 등 20여 명을 정사공신으로 추대하고, 전택과 노비를 각각 하사한다.

이 책의 내용은 인목대비에 대한 소개로부터, 선조가 죽을 때 일곱 대신에게 내린 유교의 내용, 광해군의 즉위, 폐모대론, 대비의 서궁유폐, 인조반정의 전조(前兆), 반정의 진상, 반정 후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으로 엮어져 있다.

이 작품은 작자는 서로 달라도 성격상 『계축일기』의 후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두 작품은 1613년(광해군 5) 계축년과 1623년(광해군 15) 계해년의 10년이라는 시간적 거리, 즉 ‘일기’와 ‘반정록’의 개념 차만큼 서술입장이 대조적이다. 즉 『계축일기』는 인목대비 편에서 그의 불행한 처지에 같이 울고, 적대되는 광해군 편에 대해서는 증오·경멸하여, 그 작가적 자세에 노골적으로 편파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책은 폐모 논의 때 신하들이 임금께 글을 올리고, 임금이 이에 대한 가부를 적어 내린 상소비답의 내용에 있어, 실록대로 비교적 공정한 입장을 취하였으며, 마음 약한 광해군의 모습을 묘사하여, 오히려 동정적인 면도 기록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실제의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내용에서는 사실과는 어긋나는 몇 가지의 대목으로 보이므로, 제작 연대는 인조반정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적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계해반정록』은 전반부는 소략하게 언급하고, 후반부는 밀도 있게 다루었으며, 특히 반정(反正) 자체에 조명을 비추었다. 이렇게 『계해반정록』은 인조반정의 실기에 약간의 일화를 삽입한 정도의 공적 기록 같은 인상을 주는 점에서 실기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계해반정록』의 문학적 가치로는 『계축일기』의 애련한 감상과 호소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참고문헌

  • 김용숙, 「<癸亥反正錄>의 몇가지 問題點」, 『청파문학』 12권, 숙명여자대학교, 1977.
  • 민영대, 「癸亥反正錄 小考」, 『한국언어문학』 제26호, 한국언어문학회, 1988.
  • 정병욱, 『한국고전의 재인식』, 홍성사, 1979.
  • 최동안, 「『癸亥反正錄』의 悲劇的 構造」, 『성심어문논집』 제5집, 성심어문학회, 1981.
  • 최동안, 「『癸亥 反正錄』 硏究」, 가톨릭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