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조굴(繼祖屈)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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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계조굴 |
한글표제 | 계조굴 |
한자표제 | 繼祖屈 |
동의어 | 계조암(繼祖庵) |
관련어 | 능인암(能仁庵), 선정사(禪定寺), 신흥사(神興寺), 신흥사(新興寺), 향, 자장(慈藏), 향성사(香城寺)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신라, 조선 |
집필자 | 이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계조굴(繼祖屈)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7년 5월 11일 |
설악산 신흥사로부터 북쪽으로 2.3㎞ 떨어진 산내 암자.
개설
계조굴(繼祖屈)은 신흥사의 산내 암자인 계조암(繼祖庵)을 말한다. 자장(慈藏) 율사(律師)가 652년(신라 진덕여왕 6)에 설악산 천후봉(天吼峰) 아래에 향성사(香城寺)를 창건하고 9층탑을 조성하여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였으며, 계조암과 능인암(能仁庵)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698년에 화재가 일어나 향성사와 능인암이 무너지자, 701년에 의상 대사가 능인암 터에 향성사를 옮겨 지어 선정사(禪定寺)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1644년에 영서(靈瑞)·연옥(蓮玉)·혜원(慧元) 세 승려가 선정사를 옮겨 짓고 신흥사(神興寺)라고 고쳐 불렀다. 이후 계조암은 신흥사의 산내 암자가 되었다.
내용 및 특징
계조굴은 신흥사의 산내 암자인 계조암의 다른 이름이다. 신흥사로부터 북쪽으로 2.3㎞ 떨어진 천후산 아래에 있는 암자이며, 뒤로는 울산바위가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정면으로는 권금성과 달마봉이 마주하고 있다. 일명 목탁바위로 알려진 천연 석굴을 암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계조굴이라고도 부른다. 석굴의 문 역할을 하는 쌍룡바위를 통과해 석굴 내부의 법당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외부에 삼성각과 요사채가 세워져 있다.
변천
계조암의 본사인 신흥사는 652년(신라 진덕여왕 6) 자장(慈藏) 율사(律師)가 설악산에 향성사(香城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로 전한다. 자장율사는 향성사에 9층석탑을 조성하여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한 후 계조암과 능인암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8세기의 여러 기록에서는 신흥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자장율사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1750년에 기록된 「설악산신흥사대법당중창기(雪嶽山神興寺大法堂重創記)」와 1761년에 용암체조(龍岩體照)가 쓴 「설악산신흥사대법당석체기(雪嶽山神興寺大法堂石砌記)」에 의하면, 원효와 의상이 보타산에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한 후 계곡을 따라 30리쯤 떨어진 곳의 천후봉(天吼峰) 아래에 터를 잡고 선정사(禪定寺)라고 이름 붙였고, 신라 애장왕 때에 동산(洞山)·각지(覺智)·봉정(鳳頂) 세 승려가 선정사에 주석하였다고 한다. 그 후 사찰이 쇠락하여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 되었는데, 1644년(인조 22)에 영서(靈瑞)·연옥(蓮玉)·혜원(慧元) 세 승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우고 신흥사라 칭하였다. 신흥사(神興寺)라고 이름 붙인 연유에 대해서는 절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수천 척 높이의 미륵봉이 있고, 또 만길 낭떠러지 암석 아래 인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비발라굴(毘鉢羅屈)이라 칭하는 곳이 있는데, 그 모양이 『화엄경』에서 가섭존자(迦葉尊者)가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벽옥발우(碧玉鉢盂)를 가지고 비발라굴에서 미륵불을 기다리는 형세와 같아서 신흥사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즉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룬 곳이 설산(雪山)이어서 설악과 이름이 같고, 가섭존자가 미륵불을 기다리는 형세와 같으므로, 미륵불이 흥기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신흥’이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향성사지(香城寺址) 3층석탑이 신흥사 가는 길에 현존하고, 1928년에 만해한용운이 편찬한 『건봉사급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及乾鳳寺本末事蹟)』의 「신흥사사적(神興寺史蹟)」에 자장 율사가 향성사를 창건하고 9층탑을 조성하였다고 하였으므로, 향성사지는 신흥사의 옛 가람이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신흥사사적」에 따르면, 자장 율사가 652년(신라 진덕여왕 6)에 향성사를 창건하면서 9층석탑을 조성하여 불사리를 봉안하고 계조암과 능인암을 창건했는데, 698년(신라 효소왕 7)에 화재가 일어나 향성사와 능인암이 불탔다고 한다. 그 후 의상 대사가 701년(신라 효소왕 10)에 능인암 터에 옮겨 중건하고 선정사라고 절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선정사에 관한 기록이 없고, 임진왜란 때 9층탑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신흥사와 계조암에 대한 기록은 숙종대부터 다시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681년(숙종 7) 5월에 일어난 지진으로 신흥사도 크게 파괴되었던 것 같다. 강원도에서 지진이 일어나 우레 같은 소리가 나고 담벽이 무너졌으며, 기와가 날아가 떨어졌다. 양양(襄陽)에서는 바닷물이 요동쳤는데, 마치 소리가 물이 끓는 것 같았고, 설악산신흥사와 계조굴의 큰 바위가 모두 무너졌을 정도였다(『숙종실록』 7년 5월 11일). 1890년(고종 27)에 승려 응화(應化)가 계조암에 삼성각(三聖閣)을 세웠으며, 1908년에 승려 동암(東庵)이 법당을 단청하고, 승려 동고(東杲)가 법당의 후불탱화를 조성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사찰령과 30본말사법을 제정하여 전국의 사찰을 30본사 아래에 소속시켰을 때, 신흥사는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본사(本寺)였던 건봉사가 전부 파괴됨에 따라 1975년에 신흥사가 제3교구 본사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95년에 신흥사의 ‘신(神)’자를 ‘신(新)’으로 바꾸어 현재는 신흥사(新興寺)로 표기하고 있다. 계조암은 신라시대 창건 이래 신흥사 승려의 수행처였으며, 19세기 삼성각과 요사채가 세워진 후 산내 암자로서 사격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 오경후·지미령, 『설악산 신흥사』, 활불교문화단, 2012.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국학문헌연구소, 『건봉사급건봉사본말사적』, 아세아문화사, 1977.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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