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빈(界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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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세에 번영하였던 대판부의 상업도시.

개설

계빈(界濱)은 현재 일본대판부(大阪府) 계시(堺市, [사카이시])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16세기 이래 발달한 상업도시이며, 통신사(通信使)의 사행로(使行路) 상에 위치한 곳이었다.

명칭 유래

계(堺)라는 지명은 평안시대(平安時代)부터 발견되는데, 이 지역이 일본의 행정구역인 국(國)의 경계 지역이었기 때문에 경계라는 뜻의 사카이(境)라고 불렸고, 이것이 후에 발음과 뜻이 비슷한 사카이(堺)로 바뀌었다고 보인다. 계빈(界濱)은 계(堺)와 같은 음의 글자인 계(界)에 물가라는 뜻의 빈(濱)을 붙여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부르던 명칭으로 보인다.

자연 환경

사카이[堺]는 대판만의 서남쪽에 위치하는 곳으로 대화천(大和川)을 끼고 있어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자원을 내지까지 옮기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한편 북쪽으로는 대판에 접해 있었다. 때문에 예로부터 대판만으로 들어오는 물자를 수운을 이용해 대판과 경도(京都)까지 옮기는 입구의 역할을 하였다. 한편 하천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형은 비교적 평탄한 대지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형성 및 변천

계는 일본에서 가장 큰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있기도 한 곳으로 고대부터 비교적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계가 도시로서 발전한 것은 실정시대(室町時代) 이후였다. 계의 상인들이 항구를 통하여 명(明) 및 포르투갈 등 유럽인들과 무역하면서 본격적인 상업도시로서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계는 상인들에 의하여 운영되는 자치도시가 되었다. 계를 통하여 유입되는 유럽의 화기(火器)를 독점하기 위하여 직전신장(織田信長)에 의하여 자치권이 폐지되기도 하였으며, 계의 상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치하에서는 상인들이 대규모 대판으로 이주하면서 도시 기능이 쇠퇴하기도 하였다. 이후 강호막부(江戶幕府)의 쇄국정책으로 인하여 항만의 기능이 예전보다 쇠퇴하고 대판 경제권에 편입되면서 전성기의 명성을 되찾지는 못하였다. 현재는 대판 대도시권에 포함되어 있으며 공업도시로 크게 성장하였다.

관련 기록

계는 조선에 계빈(界濱)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선조 23) 조선에서 일본의 정세를 살펴보기 위하여 파견한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 등은 대마도를 거쳐 박다(博多)·명고옥(名古屋) 등을 거쳐 계빈(界濱), 즉 계에 이르러 배에서 내려 안내하는 이의 영접을 받았다. 풍신수길을 접견한 통신사 일행은 그가 답서(答書)를 주지 않고 기다리라고 하자 혹여 붙들리까 봐 계로 물러나와 답서를 기다렸다고 한다(『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통신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사카이는 5층·3층의 층루가 무수히 많고 난간이 있어 그 밑으로 배가 지나가며 여염집과 시장이 섞여 있어 마치 중국의 통주(通州)와 같았다고 한다(『선조실록』 30년 1월 24일).

1590년의 통신사행에서는 바로 이곳에서 내려서 육로로 이동한 것으로 보이나 이후 작성된 『계미동사일기(癸未東槎日記)』·『부상록(扶桑錄)』·『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등의 사행록을 보면 배로 지나갈 뿐 상륙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일본왕환일기』에 육로로 이동할 경우 시일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계미동사일기(癸未東槎日記)』
  • 『부상록(扶桑錄)』
  •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 『문견별록(聞見別錄)』
  • 『징비록(懲毖錄)』
  • 나카오 히로시, 『조선통신사 이야기: 한일 문화교류의 역사』, 한울, 2005.
  • 유종현, 『통신사의 길을 따라가다』, 새로운사람들, 2010.
  •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조선통신사 옛길을 따라서』, 한울, 2007.
  • 이원순, 「조선왕국의 대외정책과 조선통신사의 위상」, 『조선통신사연구』 1, 조선통신사학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