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양전(癸卯量田)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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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계묘양전 |
한글표제 | 계묘양전 |
한자표제 | 癸卯量田 |
상위어 | 양전(量田) |
관련어 | 갑술양전(甲戌量田), 경자양전(庚子量田), 경자양안(庚子量案), 양안(量案), 시기결(時起結), 진전(陳田) |
분야 | 경제/재정/양전 |
유형 | 법제·정책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오인택 |
시행시기 | 1601년(선조 34)~1604년(선조 37)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계묘양전(癸卯量田) |
1601년(선조 34)부터 1604년(선조 37)까지 조선 정부가 전국적으로 시행한 토지조사사업.
개설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600년(선조 33) 정부는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결정하고, 1601년(선조 34)에 양전조사에 착수하여 1604년(선조 37)에 완료하였다. 이 사업이 주로 1603년(선조 36)에 시행되었기 때문에 그해의 간지를 사용하여 계묘양전(癸卯量田)이라 부른다. 임진왜란 중에 전국적으로 토지대장이 소실되고 극히 일부 지역만 이전의 토지대장을 보유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정부는 경작되는 토지인 시기결(時起結)만을 해마다 조사하여 세금을 거두었고, 반면 각 군현과 양반지주층의 은루결(隱漏結)은 점차 확대되었다. 그 결과 부세 부담은 시기결에 속한 농민층에게 편중되었으며, 정부의 재정 사정 또한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하지만 각 군현 및 양반지주층의 반대로 말미암아 정부는 경작되지 않던 진황지는 제외하고 경작되던 시기결만을 조사하여 토지대장을 작성하였다. 그 결과 30만여 결에 불과하던 수세지가 54만여 결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진황지가 조사되지 않아서 임진왜란 이후 광범위하게 개간되던 진황지가 은루결로 편입되는 한계를 남겼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직후 파악된 호구는 임진왜란 이전의 1/10 수준이었고, 전국의 토지는 30만여 결로서 평시의 1/5 수준에 그쳤다. 이로 인하여 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다. 특히 수세지가 극감한 것은 임진왜란으로 경지가 황폐화된 탓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대부분의 토지대장이 소실되면서 경작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지주층의 은루결이 확대되면서 부세 부담은 농민층에게 편중되었다. 이에 정부는 1600년(선조 33) 전국적인 토지조사를 결정하고 1601년(선조 34)부터 시행하여 1604년(선조 37)에 완료하였다. 하지만 정부에 대한 민심이반이 극심한 시기에 지주층의 조직적인 반대로 인하여 제대로 된 토지조사를 할 수 없었다. 정부는 단지 임시변통으로, 경작하던 토지인 시기결만을 조사하여 불완전한 토지대장을 작성하였다.
내용
임진왜란 직후 전국적으로 토지대장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토지에 대한 정부의 수세 능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이에 심각한 재정난과 농민층의 부세 편중을 해결하기 위하여 토지조사사업이 절실히 요청되었고, 1600년(선조 33) 정부는 전국적인 토지조사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당시는 통치 권력이 취약하였기 때문에 임시적인 토지조사의 방식을 선택하였다. 정부가 토지조사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고, 시기결과 진황지를 각 읍이 감영을 통하여 정부에 보고하고, 정부는 재상경차관(灾傷敬差官)을 파견하여 각 도별로 1개 군현을 추첨하여 조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각 군현의 반대에 직면하였다. 진황지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면세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주층은 진황지를 등록하면 곧바로 전세를 납부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1개 군현의 추첨 조사는 추첨된 읍과 그렇지 않은 읍의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에 1601년(선조 34) 실시된 토지조사는 경작되던 시기결만을 대상으로 하고, 감독 방식은 1604년(선조 37) 각 도에 2명씩 양전어사(量田御史)를 파견하여 양전이 종료된 읍의 1개 면을 추첨하여 조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변천
1604년 완료된 계묘양전을 통하여 30만여 결에 불과하던 정부의 수세지가 54만여 결로 증가하였다. 하지만 진황지를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진황지의 개간 과정에서 은루결이 급증하는 결과를 허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정부가 계묘양전 이후 개간되는 진황지를 관리할 수 없었다. 1604년(선조 37) 계묘양전부터 1634년(인조 12) 갑술양전(甲戌量田) 때까지는 개간의 시대라 할 만큼 임진왜란 과정에서 황폐화된 진황지가 대규모로 개간되던 시기였다. 특히 이들 진황지 개간을 주도한 것은 양반지주층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지주전호제가 급격히 확대되었다. 이러한 토지들은 1604년(선조 37) 계묘양전의 한계로 인하여 정부가 파악하지 못한 대규모의 은루결을 지방관청과 양반지주층이 향유하였다. 따라서 이후 정부의 양전정책은 지방관청과 양반지주층의 조직적인 저항을 피할 수 없었다. 1634년(인조 12)의 갑술양전은 그러한 과정에서 실시된 강력한 정치적 의지의 산물이었지만, 양전은 시행할수록 더 큰 저항에 직면하였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김태영, 『조선전기토지제도사연구』, 지식산업사, 1983.
- 박종수, 「16·17세기 전세의 정액화 과정」, 『한국사론』 30, 1993.
- 오인택, 「조선후기 계묘·갑술 양전의 추이와 성격」, 『부대사학』 19, 199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