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전(景禧殿)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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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경희전 |
한글표제 | 경희전 |
한자표제 | 景禧殿 |
상위어 | 혼전(魂殿) |
관련어 | 문종(文宗), 현덕왕후(顯德王后) |
분야 | 왕실/왕실의례/흉례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현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경희전(景禧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3년 9월 22일, 『문종실록』 즉위년 7월 1일, 『단종실록』 즉위년 5월 22일, 『단종실록』 즉위년 6월 20일, 『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3일 |
경복궁에 있던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왕과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는 개인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반면,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었다.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왕과 왕후의 승하하는 시기는 대부분 다르므로 각자 혼전을 설치하여 혼전명 역시 따로 지었다. 그러나 조선초기에는 왕후가 먼저 죽어 혼전이 설치되어 있으면, 왕이 승하하여 산릉에 시신을 매장한 뒤 혼전에 왕후의 신주와 함께 봉안하여 하나의 혼전을 사용하기도 했다.
경희전은 문종과 현덕왕후의 혼전이다. 세자빈이었던 현덕빈(顯德嬪)이 1441년(세종 23)에 죽어 신주를 혼궁(魂宮)에 봉안하였고 ‘현덕빈 혼궁’이라 일컬었다. 문종이 즉위하면서 현덕빈을 왕후로 추숭(追崇)하자 혼전으로 격상하면서 비로소 ‘경희전’이라는 혼전명을 붙였다. 1452년(문종 2) 문종이 승하하자 경희전에 문종의 신주를 함께 봉안하였다. 문종의 3년 상제가 끝난 후에 종묘에 함께 부묘하였다.
내용 및 특징
1441년 7월 24일 왕세자빈이 동궁 자선당(資善堂)에서 졸하자 창덕궁 의정부청(議政府廳)에 빈궁(殯宮)을 마련하였다. 3개월 뒤인 9월에 옛 안산(安山)와리산(瓦里山)에 장례를 치르고, 다음 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궁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세종실록』 23년 9월 22일). 이때 조성한 혼궁은 궁호(宮號)가 없었다.
세자나 세자빈의 신주를 봉안하는 혼궁에는 따로 궁호를 정하지 않았다. 현덕빈의 혼궁은 ‘현덕빈 혼궁’으로 불렸다. 세자보다 먼저 졸한 소내상(小內喪)이었으므로 세자가 훙서할 때까지 계속 혼궁에 봉안되어 있었다.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한 1450년(문종 즉위)에 세종의 졸곡제(卒哭祭)를 지낸 뒤 현덕빈을 왕후로 추숭하였다. ‘현덕빈’에서 ‘현덕왕후’로 격상되면서 비로소 혼전에 전호(殿號)를 붙일 수 있게 되었고, 현덕왕후의 혼전을 ‘경희전’이라 일컬었다(『문종실록』 즉위년 7월 1일). 경희전이라는 혼전의 명칭이 이때 비로소 등장하였다.
1452년 문종이 승하하고 즉위한 단종은 문종을 현릉(顯陵)에 장례지내고, 자선당을 수리하여 문종의 혼전으로 삼기로 하였다(『단종실록』 즉위년 5월 22일). 수리한 자선당에 현덕왕후의 신주를 옮겨 봉안하면서 예전 명칭대로 경희전이라 칭하였다(『단종실록』 즉위년 6월 20일). 문종이 재위한 동안은 현덕왕후의 혼전만을 경희전이라 불렀다가 문종이 승하하면서 문종과 현덕왕후의 신주를 함께 모신 혼전을 경희전이라 일컬었다.
현덕왕후의 신주만 봉안하던 ‘구’ 경희전은 장의동(藏義洞)에 위치하였다(『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3일). 현덕왕후의 신주를 경복궁의 ‘새’ 경희전으로 옮겨 봉안한 뒤, 장의동에 있는 경희전을 수리하여 궁인들의 병을 치료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한 기록에서 알 수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경희전은 현덕왕후 혹은 문종과 현덕왕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문종을 현릉에 하관(下官)한 뒤 반우하였고, 이미 악차(幄次)에 도착해 있는 현덕왕후의 신주와 함께 ‘새’ 경희전에 봉안하였다. ‘새’ 경희전에서 초우제(初虞祭)를 비롯하여 졸곡제를 지냈다. 이어서 연제, 대상제(大祥祭), 담제를 거행하였다.
1454년(단종 2) 7월 15일 ‘새’ 경희전에서 문종과 현덕왕후의 신주를 받들고 종묘로 나아갔고, 그 다음 날 종묘에 부묘하였다. 경희전은 문종이 즉위하여 현덕빈을 현덕왕후로 추숭하고 혼전을 경희전이라고 일컬었던 1450년 7월 1일부터 문종과 현덕왕후의 신주를 부묘한 1454년 7월 15일까지 설치되었다. 경희전의 위치는 ‘구’ 경희전은 장의동에, ‘새’ 경희전은 자선동에 있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새’ 경희전이 있었던 동궁 자선당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없어질 때 소실되었다. 자선당은 고종 초기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복원되었다.
참고문헌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종묘의궤(宗廟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