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흥부(慶興府)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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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경흥부 |
한글표제 | 경흥부 |
한자표제 | 慶興府 |
동의어 | 공주(孔州), 광주(匡州), 추성(楸城),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
관련어 | 육진(六鎭)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우철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경흥부(慶興府)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7년 2월 3일, 『세종실록』 19년 4월 2일, 『세종실록』 25년 5월 10일, 『세조실록』 5년 4월 26일, 『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
조선시대 함경도 경흥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경흥부(慶興府)는 1443년(세종 25)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경흥군(慶興郡)으로 변경되기까지 함경도 북부 지방의 행정과 군사상의 요지로 기능하였다. 육진(六鎭)의 개척 과정에서 설치되어 두만강을 사이에 둔 동북 지역 국경선을 확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본래 고구려의 옛 땅으로, 당(唐)나라가 한때 지배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때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지역이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건국 당시 이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고, 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뒤 오랫동안 거란과 여진(女眞) 등 이민족의 지배 아래 있었다. 여진은 이 지역을 다온평(多溫平)이라고 불렀다.
고려말 공민왕 때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하고 북진, 두만강 최하류 지방까지 수복하여 동북면(東北面)이라고 불렀다. 경원 지방과 지금의 경흥 지방을 합쳐 공주(孔州) 혹은 광주(匡州), 추성(楸城)이라고 불렀다.
조선이 건국한 뒤 1398년(태조 7)에 공주 옛터에 돌로 성을 쌓았다. 같은 해 동북면(東北面)의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의 이름을 나누어 정할 때 경원부를 설치하였다(『태조실록』 7년 2월 3일). 1409년(태종 9)에 경원부 읍치를 소다로(蘇多老)의 옛 영(營)으로 옮겨 설치했다가, 1410년(태종 10)에 여진의 침략으로 인해 민호를 모두 경성으로 옮기고 그 땅을 비워 두는 한편, 경원군의 읍치도 경성에 병설하였다. 1417년(태종 17)에 다시 지금의 부령군(富寧郡)인 부거(富居)에 읍치를 설치하고 경원부를 회복하였다. 육진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1434년(세종 16)에는 옛터가 있던 소다로 북쪽의 회질가(會叱家)로 경원부의 치소를 다시 옮겼다. 이때 예전에 공주에 속했던 경흥 지방을 분리하여 공성현(孔城縣)이라 부르면서 첨절제사(僉節制使)가 현사(縣事)를 겸임하게 했다. 1437년(세종 19)에 목조(穆祖)가 처음 터전을 닦은 땅이라는 이유로 군으로 승격시키고 지금의 이름인 경흥(慶興)으로 고쳤다(『세종실록』 19년 4월 2일). 1443년(세종 25)에 다시 그 성을 넓혀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고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세종실록』 25년 5월 10일).
조직 및 역할
도호부사(都護府使) 즉 부사(府使)는 조선전기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종3품으로 규정되었지만, 조선후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문관(文官)이나 무관(武官) 정3품으로 되어 있다. 임기는 30개월이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부사에 직속된 이속(吏屬)으로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대동감관(大同監官) 1명, 군관(軍官) 2명, 아전(衙前) 97명, 지인(知印) 59명, 사령(使令) 24명, 군뢰(軍牢) 10명, 관노(官奴) 58명, 관비(官婢) 48명, 봉무사(烽武士) 96명, 봉복직(烽卜直) 24명이 있었다.
남쪽 지방과 달리 함경도와 평안도에는 토관으로 몇 개의 행정 기구가 설치되었다. 경흥의 토관직으로는 우선 도할사(都轄司)에 종6품의 도할(都轄)과 정7품의 전사(典事) 각 1원을 두었으며, 전례서(典禮署)에 종6품의 감부(勘簿), 종8품의 급사(給事), 종9품의 섭사(攝事) 각 1원을 두었다. 융기서(戎器署)·사창서(司倉署)에 종7품의 장사(掌事)와 종9품의 섭사 각 1원을 두었으며, 전주국(典酒局)에 급사·섭사 각 1원을 두었다. 그리고 사옥국(司獄局)에 섭사 1원을 두었다. 이상은 문관으로 관찰사가 본도 출신 중에 후보자를 추천하였다.
이 밖에 무관 토관직도 설치되었는데, 절도사가 본도 출신 중에 후보자를 추천하였다. 유원위(柔遠衛)에 정6품의 여과(勵果), 종6품의 부여과(副勵果), 정7품의 여정(勵正), 종7품의 부여정(副勵正) 각 1원, 정8품의 여맹(勵猛) 2원, 종8품의 부여맹(副勵猛) 3원, 정9품의 여용(勵勇) 3원과 종9품의 부여용(副勵勇) 5원을 두었다. 토관이 경관(京官)으로 임명될 때에는 문반과 무반 모두 1품계를 강등하여 적용하였다. 토관은 퇴관(退官)할 차례가 되었어도 나이 60세가 되어서야 퇴직하였다.
경흥의 관할 행정구역으로는 『여지도서』에 7사(社)가 소개되어 있다. 관아가 소재한 읍사(邑社)를 위시하여 무이사(撫夷社), 아오지사(阿吾地社), 무안사(撫安社), 해정사(海汀社), 서수라사(西水羅社), 조산사(造山社)가 있었다. 또 경흥은 군사적으로 북병영(北兵營) 후위진(後衛鎭)에 해당하는데, 조산보(造山堡)·무이보(撫夷堡)·서수라보(西水羅堡)·아오지보(阿吾地堡) 등 4개의 보를 관할하였다.
변천
1459년(세조 5) 지세가 경사지고 토지도 척박하다는 이유로 무안보(撫安堡)로 읍치를 옮겼다(『세조실록』 5년 4월 26일).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가 대구역주의인 8도제에서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뀌면서 경성부(鏡城府) 소속의 경흥군으로 바뀌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
- 윤정애, 「한말 지방제도 개혁의 연구」, 『역사학보』105, 역사학회, 198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