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회문(慶會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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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경회루 남쪽에 있었던 문.

개설

경회문(慶會門)은 ‘경회(慶會)’라는 문의 이름과 명종대의 기록 중 경복궁 내반원이 ‘경회문 서변’에 있다는 단서(『명종실록』 즉위년 9월 8일)를 통해 경회루의 남쪽에 있었던 문으로 추측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세종대부터 명종대에 이르는 시기에만 등장하며, 「북궐도형(北闕圖形)」과 「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 등 고종대에 중건한 이후의 도판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중건한 경복궁의 모습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한 『궁궐지(宮闕志)』의 기록에서도 경회문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 없다. 『한경지략(漢京識略)』, 『동여비고(東輿備考)』,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지리서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다.

『관동별곡(關東別曲)』에는 ‘연추문(延秋門) 달려 들어가 경회남문 바라보며’라 하여 경회(남)문이 연추문, 즉 경복궁 궁장의 서문인 영추문(延秋門)과 왕의 공간 사이에 놓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 세종대에 세자가 인지당(麟趾堂)에서 경회문으로 나와 조참(朝參)을 받고 사정전(思政殿)에서 정사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세종실록』 31년 6월 18일). 현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 경회루 근처에 있었던 문으로 추정되며, 형태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경회루의 성격에 따라 경회문에서는 사신을 맞이하는 일이 많았으며, 그 밖에도 회의·추국 등의 일이 경회문 밖에서 자주 있었다. ‘편문(便門)’으로 지칭되기도 하였으며(『중종실록』 32년 3월 14일), 왕의 병이 중할 때 승지들이 경회루 남문에 모이기도 하였다(『명종실록』 22년 6월 28일). 이로 볼 때 경회문은 단지 경회루로 진입하기 위한 문으로서만이 아니라 왕의 영역에서 하나의 경계로 인식되고 활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경회루는 1412년(태종 12)에 사신을 위해 잔치를 열거나 위로하는 장소로 창건되었다(『태종실록』 12년 5월 16일). 하륜(河崙)의 경회루 기문에 의하면 후전 서루를 고치고자 하다가 여의치 않아 박자청(朴子靑)이 위치를 조금 옮기고 연못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경회라는 말은 인군과 신하가 덕으로 서로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1475년(성종 6)에 대대적인 수리가 있었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대에 복구되었다. 아마도 경회문은 임진왜란 이전의 경회루 인근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사건 및 일화

세종대에는 경회문에 월화문(月華門), 근정문(勤政門)과 함께 금고(金鼓)를 설치하였다(『세종실록』 16년 7월 1일). 연산군대에는 경회문으로 공인(工人)이 들어오게 하여 배[船]를 꾸미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2월 7일).

참고문헌

  • 『관동별곡(關東別曲)』
  • 『궁궐지(宮闕志)』「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문화재청, 2009.
  • 홍순민, 「조선왕조 궁궐 경영과 “양궐체제”의 변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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