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중명(耿仲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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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청초 때에 명을 배반하고 후금에 항복한 인물.

개설

경중명은 요동 사람으로, 명나라에서 등주참장을 지냈다. 1633년 공유덕(孔有德)과 함께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皇太極], hongtaiji)에게 항복하였다. 후금의 총병관(總兵官)으로 임명되어 요양에 주둔하였다. 그는 1636년에 회순왕(懷順王)에 봉해지고 한군(漢軍) 정람기(正藍旗)에 예속되었다. 1649년에는 정남왕(靖南王)에 봉해졌으나, 남방을 평정하던 중 부하가 지은 죄에 연루되어, 책임을 지고 자살하였다.

활동 사항

누르하치([努爾哈赤], Nurhaci)가 요동을 점령하자 피도(皮島, [가도])로 도망간 경중명은 명의 총병인 모문룡(毛文龍)의 부하가 되었다. 1629년 모문룡이 원숭환(袁崇煥)에 의하여 살해된 후, 경중명은 등주(登州)로 도망가 손원화(孫元化)에게 의탁하였다. 그들은 후금군이 대릉하성(大凌河城)을 공격하는 것을 계기로 무리를 불러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경중명 등의 반란으로 혼란이 가중되었지만 명나라는 후금 침입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이들의 토벌에 나서지는 못하였다. 1632년 1월 경중명은 공유덕과 함께 등주성을 공략하고 이어 인근에 위치한 내주(萊州)까지 함락시켰다. 다급해진 명은 죄를 사면해 준다는 면사패(免死牌)를 경중명 등에게 하사하며 귀순을 제의하였으나 거부하였다. 이들은 내주를 함락시킨 이상 북경(北京)까지 진군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0년 6월 24일).

1633년 3월 가도부총(椵島副摠)심세괴(沈世魁)는 조선에 표문을 보내, 공유덕 등이 배를 탈취하여 여순(旅順)으로 도망갔다고 하면서 조선의 해안으로 숨어들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표문을 보내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1년 3월 13일). 이후 경중명 등이 장자도(獐子島)에 도착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비변사에서는 후금과 합류하기 전에 섬멸하여 조선의 근심거리를 제거하겠다고 하면서 평안감사 등에게 요격할 것을 준비하도록 하라고 인조에게 건의하기도 하였다.

후금은 압록강에 닿아 있는 구련성(九連城) 일대에 병력을 배치하고 경중명 일행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명나라의 주문욱(周文郁)이 이끄는 병사들이 압록강 부근의 탁산(卓山)이라는 곳에서 경중명 등이 거느린 군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이후 주문욱 군이 마타자를 공격할 때는 조선군도 동참하였다. 하지만 후금군의 지원을 받은 경중명 등이 후금에 투항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경중명 등이 전함과 수군을 이끌고 귀순해 오자 홍타이지는 환대하였다. 수군이 약한 후금으로서는 한 번에 전력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중명 등이 심양으로 들어오자 홍타이지는 궁궐 밖 10리까지 나와 서로 껴안은 포견례(抱見禮)를 하며 맞이하였다. 당시 홍타이지가 매우 기뻐하였음은 후금의 신하들이 너무 지나치다며 말릴 정도였다는 데서 짐작할 수가 있다.

홍타이지는 경중명을 총병관(總兵官)에 임명하였으며, 경중명의 휘하 부대를 천우병(天佑兵)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636년 4월에 회순왕(懷順王)에 봉해지고 1642년 8월에 한군(漢軍) 정황기(正黃旗)에 예속되었다. 후금의 명 공격과 조선과의 전쟁에 여러 차례 종군하였다. 1644년에는 도르곤([多爾袞], dorgon) 휘하로 입관(入關)해서 이자성(李自成)의 군대를 물리치고 양주(楊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호광(湖廣)·광동(廣東) 방면에 진군하여 공을 세웠다. 1649년 5월에 군공으로 정남왕(靖南王)에 봉해졌으며, 광동 정벌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해 11월에 남방을 평정하던 중 부하가 투항한 자를 숨긴 죄에 연루되어 책임을 지고 자살하였다.

참고문헌

  • 『내국사원당(內國史院檔)』
  • 『명사(明史)』
  • 『청사고(淸史稿)』
  •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
  • 한명기, 『병자호란』, 푸른역사, 2013.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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