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전(慶成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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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강녕전의 서소침.

개설

경성전(慶成殿)은 연생전(延生殿)과 함께 강녕전(康寧殿)의 동서 소침을 이루는 건물이다.

위치 및 용도

경성전은 경복궁 내전의 강녕전 서쪽에 동향으로 배치되었다. 강녕전의 서소침(西小寢)으로 침전 기능을 보조하는 역할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조선 개국 직후에 경복궁의 서소침으로 지어졌으며(『태조실록』 4년 9월 29일). 판삼사사(判三司事)정도전(鄭道傳)이 경성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각의 이름은 하늘과 땅은 만물(萬物)을 봄에 낳게 하여 가을에 결실하게 하는 천지의 운행(運行)에 근거하여 동소침 연생전과 서소침 경성전으로 정하였다. 왕이 천지가 생성하는 것을 본받아서 그 정령을 밝히게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태조실록』 4년 10월 7일).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대에 이르러 복구되었다.

경성전은 다시 1876년(고종 13)에 불타 전소되었다(『고종실록』 13년 11월 4일). 이후 재차 중건되었으나 다시 1890년(고종 27)에 화재를 당하였다(『고종실록』 27년 6월 17일). 고종대에 중건할 때 서사관(書寫官)은 조성하(趙成夏)였으며(『고종실록』 2년 9월 17일), 재차 중건할 때에는 상량문제술관(上樑文製述官)에 윤자덕(尹滋悳), 서사관에 민종묵(閔種默), 현판서사관(懸板書寫官)에 김영목(金永穆)을 제수하였다(『고종실록』 25년 5월 19일). 1917년에 창덕궁 내전 화재를 복구하는 데 재목이 쓰이면서 훼철되었다가(『순종실록』 10년 11월 27일), 1995년에 복원되었다.

형태

조선 개국 직후 창건 당시에는 ‘서소침 3칸’으로만 기록되었다. 조선전기의 경복궁을 그린 여러 그림에 묘사되었는데, 창건 당시에는 연침 즉 강녕전의 앞을 가로로 지나는 행각에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전기의 모습을 묘사한 「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 등에는 강녕전과 교태전 사이의 행각에서 연결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형태가 다르다.

「북궐도형(北闕圖形)」에는 퇴칸을 포함하여 정면 7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그려졌다. 강녕전의 서쪽에 동향으로 배치되었으며, 정면 북쪽 퇴칸으로부터 강녕전 남쪽 퇴칸에 복도가 연결되었던 흔적이 있다. 『진찬의궤(進饌儀軌)』 등의 도판 자료에서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경복궁 내전에서 일어난 화재를 전후하여 경성전과 강녕전 사이를 연결하던 복도의 형태는 정식의 구조체였던 것이 간이 구조로 바뀌었다. 1892년(고종 29)의 진찬에서는 중배설청이 설치되었는데, 이때 복도는 중배설청과 진찬소 사이를 연결하는 동선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서향한 경성전의 중앙부에는 정면 2칸의 대청이 있고 퇴칸을 포함하여 남쪽으로 2칸, 북쪽으로 3칸의 온돌방이 각각 연결되어 비대칭적 구성을 하였다. 동쪽 전면부를 제외하면 온돌방 주변의 퇴칸도 모두 방이었다. 팔작의 기와지붕이며 양상도회로 마룻대를 장식하고 잡상을 얹었다. 사각형 기둥에 이익공을 얹은 구조이다. 마주 보는 연생전과 동일한 형태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명종이 승하했을 때 상차(喪次)로 사용되었다(『명종실록』 22년 6월 28일). 고종의 ‘희문과(喜聞過)’ 3자를 경성전의 문설주에 편액을 만들어 달았던 바 있다(『순종실록 부록』 12년 3월 4일).

참고문헌

  • 『진찬의궤(進饌儀軌)』「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 경세진·조재모, 「조선후기 궁중연향시 숙설소와 중배설청의 배치와 운영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24권 6호, 2015.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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