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섬(慶暹)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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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경섬 |
한글표제 | 경섬 |
한자표제 | 慶暹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광해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퇴보(退夫) |
호 | 삼휴자(三休子)·석촌(石村)·칠송(七松)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2년(명종 17) |
사망 | 1620년(광해군 12) |
본관 | 청주(淸州) |
주거지 | 서울[京]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대당리(大塘里) |
증조부 | 경세청(慶世淸)→(증)이조 참판(吏曹參判) |
조부 | 경혼(慶渾);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 |
부 | 경시성(慶時成); 예천군수(醴泉郡守) →(증)이조 판서(吏曹判書) |
모_외조 | 죽산박씨(竹山朴氏); 돈녕부 정(敦寧府正) 박난영(朴蘭榮)의 딸 |
형제 | (동생) 경선(慶選) (동생) 경지(慶遲)→초명(경괄(慶适)); 안산군수(安山郡守) (동생) 경달(慶達) |
처_장인 | 전주이씨(全州李氏); 이극강(李克綱)의 딸 |
자녀 | (1자) 경유후(慶有後); 사산감 역(四山監役)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경섬(慶暹) |
총론
[1562년(명종 17)∼1620년(광해군 12) = 59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호조 참판(參判)이다. 자(字)는 퇴보(退夫)이고, 호(號)는 삼휴자(三休子)·석촌(石村)·칠송(七松)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예천군수(醴泉郡守)경시성(慶時成)이고, 어머니 죽산박씨(竹山朴氏)는 돈녕부 정(敦寧府正)박난영(朴蘭榮)의 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90년(선조 23)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다.[<사마방목>] 그 해에 증광(增廣) 문과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 이후 부모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례(喪禮)를 마친 후, 1597년(선조 30) 세자시강원 사서(司書)가 되었다.
1598년(선조 31)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서, 사헌부 지평(持平)과 사간원 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그 해에 진주사(陳奏使)최천건(崔天健)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중국에서 돌아 온 후, 1599년(선조 32)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거쳐서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1600년(선조 33) 대간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던 홍여순(洪汝諄)은 조정으로 돌아오자, 그를 탄핵했던 사람들을 모두 축출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경섬도 1601년(선조 34) 영광군수(靈光郡守)로 좌천되었다.[『연려실기술』] 그러나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홍문관 부교리이정험(李廷馦)이 경섬은 정사를 엄정하고 분명하게 하며 부역을 공평하게 하는 등 그의 치적이 호남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선조에게 보고하면서,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승진되었다.
1606년(선조 39)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고,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서,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1607년(선조 40) 회답 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부사(副使)로서 일본에 건너가 국교를 다시 열게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의 포로 1418명을 데리고 돌아왔다.[『해사록(海槎錄)』] 일본에서 돌아온 후,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 1)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고,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서, 우승지가 되었으며, 1611년(광해군 3) 좌승지에 임명되었다.
1613년(광해군 5) 형조 참의(參議)와 병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외방으로 나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당시 대북의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등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려고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궁정의 뜰에 나가 대비를 폐위하도록 광해군에게 차례로 상소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을 <정청(庭請)>운동이라고 한다. 이때 정청에 반대한 서인(西人)의 중진은 참여하지 않았으나, 경섬은 1618년(광해군 8) 정청에 참여하였다.
1619년(광해군 9) 장례원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
1620년(광해군 12) 죽었는데, 향년이 59세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대당리(大塘里)에 있다.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이극강(李克綱)의 딸인데, 슬하에 1남을 두었다. 장남은 사산감역(四山監役)을 지낸 경유후(慶有後)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간이집(簡易集)』
- 『감호집(鑑湖集)』
- 『갑진만록(甲辰漫錄)』
- 『고대일록(孤臺日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난중잡록(亂中雜錄)』
- 『남창잡고(南窓雜藁)』
- 『동사록(東槎錄)』
- 『동사상일록(東槎上日錄)』
- 『동사일기(東槎日記)』
- 『명고집(鳴皐集)』
- 『몽예집(夢囈集)』
- 『문견별록(聞見別錄)』
- 『변례집요(邊例集要)』
- 『상촌고(象村稿)』
- 『상촌집(象村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소재집(疎齋集)』
- 『수은집(睡隱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문집(龍門集)』
- 『월사집(月沙集)』
- 『일사기문(逸史記聞)』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전후사행비고(前後使行備考)』
- 『정무록(丁戊錄)』
- 『죽창한화(竹窓閑話)』
- 『죽천집(竹泉集)』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지촌집(芝村集)』
- 『태천집(苔泉集)』
- 『포저집(浦渚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한음문고(漢陰文稿)』
- 『해사록(海槎錄)』
- 『해사일기(海槎日記)』
- 『해월집(海月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