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선당(慶善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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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에서 세자가 거처한 건물.

개설

경선당(慶善堂)은 집희당(集禧堂)과 함께 세자가 사용하는 건물이었다.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따르면, 영조가 세제(世弟) 시절에 집희당은 내당(內堂)이었으며, 중서헌(重書軒)은 동궁이 신하를 만나는 곳이며, 경선당은 별당이었다. 1736년(영조 12)과 1742년(영조 17)에 영조가 경희궁으로 이어하였을 때 경선당을 동궁의 거처로 명하였으며, 영조가 세자를 만나기 위하여 경선당을 찾아가기도 했다.

영조는 경선당에 ‘추모당(追慕堂)’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글씨를 써서 현판을 걸었다. 「서궐도안(西闕圖案)」에는 경선당을 ‘추모당’으로 기록하였다.

위치 및 용도

경선당은 집희당과 함께 경희궁의 동쪽에 있다. 경선당과 집희당의 북서쪽에는 대비전으로 알려진 장락당(長樂堂)이 중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집희당과 경선당은 경희궁에서 세자가 거처하는 건물이었다. 경희궁 건립 초기에 세자의 내당은 승휘전(承徽殿)이었으나, 1698년(숙종 24)에 화재로 소실된 이후 집희당과 경선당을 내당으로 활용하였다. 영조대에 경선당을 공식적으로 세자의 공간으로 기록하였다. 1736년(영조 12)에 세자가 머무는 경선당을 찾아 신하들을 만났으며(『영조실록』 12년 9월 25일), 1741년(영조 17)에도 세자를 만나고 의관을 불러 진찰하게 하였다. 이때 경선당은 세자의 거처로 기록되었다(『영조실록』 17년 7월 24일).

세자의 자리가 비어 있을 때는 동궁 건물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1675년(숙종 1)에 숙종은 경덕궁으로 이어했는데, 이때 현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의 혼전에서 혼전의례를 행하였으므로 경덕궁으로 옮겨 모셨다. 숙종은 삼년상례 중이었으므로 정침과 편전에 머물지 않고 경선당을 여차(廬次)로 삼아 머물며 신하들을 만나고 주강을 행하였다. 1811년(순조 11)에 여러 차례 기우제를 지낼 때에도 경선당에서 재숙하였다(『순조실록』 11년 4월 22일). 이와 같이 왕이 몸을 낮추어 거할 때는 경선당을 사용하였다.

변천 및 현황

『승정원일기』 1844년(헌종 10) 8월 10일 기록에 의하면 경선당의 온돌공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온돌을 깔고 바닥을 말리는 중에 불기운이 연통을 통해 올라가 처마끝단과 풍판에까지 미쳤다. 이후 경선당을 사용한 기록은 없다. 19세기 말에 경희궁의 전각이 대부분 훼철되었기 때문에 현재 경선당은 기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형태

「서궐도안」에 집희당과 경선당은 동향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궁궐지(宮闕志)』에는 집희당의 남쪽에 경선당이 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서궐도안」의 경우가 지형을 반영하지 않고 그려졌기 때문이며, 집희당과 경선당 모두 남향으로 자리 잡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두 전각은 행각으로 사면을 둘러 각각의 영역을 형성하였으며 전각의 형태가 비슷하다. 경선당은 맞배지붕이고, 좌우에는 행각이 붙어 앞마당과 뒷마당을 나누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6칸이며, 좌우의 양 끝 칸은 퇴칸으로 규모가 작다. 실내 구조는 중앙에 2칸 규모로 마루를 두고 동·서에 온돌을 갖추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홍재전서(弘齋全書)』「서궐도안(西闕圖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