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감영(慶尙監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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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했던 광역의 지방 행정단위인 경상도를 관할하던 관청.

개설

경상도(慶尙道)는 고려시대부터 시작하였다. 명칭과 영역은 1106년(고려 예종 1)에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대체로 12세기부터는 경상도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 경상도에는 지방관으로 안찰사(按察使)가 파견되었으며, 고려후기에는 안렴사(按廉使)로 개칭하였다. 하지만 4~6품의 경관(京官)이 6개월의 임기로 파견되는 안찰사나 안렴사로는 각 도의 행정을 제대로 관할하기 어려워, 1389년(고려 창왕 1)에 안렴사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개칭하고 재추(宰樞)의 대신을 임명하였다. 도관찰출척사는 조선시대 1466년(세조 12)에 관찰사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 경상도관찰사로는 종2품의 관리가 임명되었다. 관찰사가 머무르는 관찰사영(觀察使營) 즉 감영(監營)에는 관찰사의 행정업무를 보좌하는 종5품의 도사(都事), 군사 업무를 보좌하는 3품의 중군(中軍), 기타 종9품의 심약(審藥)과 검률(檢律)이 근무하였다. 원칙적으로 조선시대 경상도관찰사의 임기는 1년이지만, 관찰사가 감영 소재 고을의 수령(守令)을 겸임할 때는 2년의 임기를 부여받았다. 고려시대에 경상도의 감영은 경주(慶州)와 김주(金州: 현 경상남도 김해시 일원)에 번갈아 위치했으나, 주로 경주에 있었다. 조선 건국 직후까지도 경주에 감영이 위치했으나, 1408년(태종 8)경에 상주(尙州)로 이전하였다. 상주에 있던 경상감영은 1593년(선조 26)에 성주(星州) 팔거현(八莒縣: 현 대구광역시 북구 및 경상북도 칠곡군 일원)으로 이전했다가 다시 1596년(선조 29)에 대구부(大邱府)로 옮겼다. 1599년(선조 32)에는 안동부(安東府)로 이전했으나, 1601년(선조 34)에 대구부로 다시 돌아왔다. 1896년(고종 33)에 경상북도와 경상남도가 분리될 때까지 경상감영은 대구에 위치하였다. 이후 경상북도의 치소는 대구에, 경상남도의 치소는 진주(晉州)에 두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광역 지방 행정단위로서 경상도의 직접적인 기원은 1106년(고려 예종 1)에 경상진주도를 설치한 데서 비롯한다. 경상진주도는 광역 행정단위인 이른바 5도양계(五道兩界)의 한 단위로서 성립하였다. 경상진주도의 영역은 과거 10도제하의 영남도·영동도·산남도의 3도 영역에 중원도(中原道)의 일부 영역을 합친 것과 같다. 경상진주도는 이후 1170년(고려 명종 1)에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합주도(晉陜州道)로 분리되었다가 1186년(고려 명종 16)에 다시 통합되어 경상주도가 되었다. 이후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 등으로 개명하였지만, 1314년(고려 충숙왕 1)에 다시 경상도가 되어 조선으로 이어졌다.

고려시대에 경상주도에는 외관으로 안찰사가 파견되었다. 『고려사(高麗史)』「백관지(百官志)」에 따르면 기존의 안찰사를 1064년(고려 문종 18)에 도부서로 고쳤다가 1113년(고려 예종 8)에 다시 안찰사로 환원했다. 그러나 동남해도부서는 고려 문종 연간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경상도안찰사가 1113년부터 파견되기 시작하였고 동남해도부서사를 겸임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276년(고려 충렬왕 2)부터는 안찰사를 안렴사라고 고쳐 불렀다. 1298년(고려 충렬왕 24)에는 경상도의 땅이 넓어 안렴부사(按廉副使)를 추가로 두기도 하였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1308년(고려 충선왕 즉위)에는 안렴사를 제찰사(提察使)로 개칭하였다가 고려 충숙왕 연간에 안렴사로 환원하였다. 1389년(고려 창왕 1)에는 안렴사의 관품이 낮다고 하여 도관찰출척사로 고치고 재추 양부(兩府)의 대신을 임명하여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공양왕이 즉위한 후 경관으로 구전(口傳)하던 관행을 폐지하고 도관찰출척사를 별도의 전임관(專任官)으로 제수하였다. 1392년(고려 공양왕 4)에 도관찰출척사는 안렴사로 환원되었으나, 조선 건국 직후인 1393년(태조 2)에 경상도안렴사는 관찰출척사로 복원되었다(『태조실록』 2년 9월 13일). 1401년(태종 1)에 다시 안렴사로 환원되었지만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관찰사로 다시 개칭되었다(『태종실록』 1년 11월 7일).

조선시대에 경상도의 영역은 고려후기 이래 몇 차례의 변화를 통해 완성되었다. 고려후기인 1259년(고려 고종 46)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설치로 인하여 동계(東界)의 영역이 축소되면서 경상도의 평해(平海: 현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일원), 덕원(德原: 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일원), 영덕(盈德: 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일원), 송생(松生: 현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 일원) 등이 명주도(溟州道) 즉 동계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이후 대부분의 고을은 경상도로 환속되었지만, 평해만 환속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평해의 경우, 고려시대에는 경상도 관할하에, 조선시대에는 강원도 관할하에 있게 되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한 보령(報令: 현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일대), 영동(永同), 청산(靑山: 현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일원), 황간(黃澗: 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일원), 관성(管城: 현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일원), 안읍(安邑: 현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일원), 양산(陽山: 현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일원), 이산(利山: 현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일원)의 8개 고을이 경상도의 영역에 소속되었지만, 조선 건국 이후인 1413년(태종 13)에 모두 충청도로 이속되었다. 보령은 보은(報恩)으로 개칭되었고, 관성·안읍·양산·이산 4개 고을은 옥천(沃川)으로 통합되었으므로, 1413년 당시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이속된 고을은 옥천·황간·영동·청산·보은 등이다. 이로써 조선시대의 경상도 영역이 완성되었는데, 고려시대의 경상도 영역보다 약간 축소되었다.

조직 및 역할

고려시대의 안찰사 즉 훗날 안렴사는 6개월의 임기를 갖고 각 지역을 순행하면서 각 고을의 수령을 감찰하고 민생의 어려움을 살폈다. 지방의 사법·행정을 감독하였으며, 때로는 군사 지휘 및 조세 징수 등에도 관여하였다. 안찰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수령 감찰이지만, 4~6품의 관품이었기 때문에 대읍의 수령보다 직급이 낮았으며 경관직을 띠고 파견되었으므로 정식의 광역 행정 장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고려말기에는 안렴사의 권한과 지위를 확립하려는 일련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고려 우왕 연간(1374~1388)에는 안렴사의 임기가 1년으로 연장되었으며, 1389년(고려 창왕 1)에는 안렴사를 도관찰출척사로 개칭하고 재추 양부의 대신으로 임명하여, 관찰사의 지위가 높아지고 권한이 강해지게 되었다. 1389년(고려 공양왕 1)에는 관찰사가 전임직(專任職)이 되었으며, 1390년(고려 공양왕 2)에는 관찰사 하부의 행정기구로 경력사(經歷司)를 설치하고 종4품의 경력(經歷)이 임명되었다. 경력은 관찰사의 수석 부관에 해당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경상도의 직제(職制)는 다음과 같다. 종2품의 관찰사 1명이 행정 사무를 총괄하였다. 또한 경상도관찰사는 종2품의 경상도병마절도사와 정3품의 경상도수군절도사를 겸임하였다. 그 밖에 종5품의 도사 1명, 종9품의 심약 3명, 종9품의 검률 1명을 두었다. 도사와 검률은 감영에서 집무를 보았으며, 심약 3명 중 1명은 관찰사가 있는 감영에 두고, 2명은 각각 좌·우 절도사영에 두었다. 도사는 고려말기에 설치된 관직으로 관찰사의 부관이라는 면에서 경력과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단 경력을 두면 도사를 두지 않고, 도사를 두면 경력을 두지 않았다. 경력은 1465년(세조 11)에 폐지되었으므로 『경국대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도사는 관찰사 유고 시에 관찰사의 직책을 대행하며, 관찰사의 지방 순행 시에 관찰사와 소관 지역을 나누어 순찰하였다. 도사의 임기는 1년이었다. 『경국대전』에는 경상도에 부 1곳, 대도호부 1곳, 목 3곳, 도호부 7곳, 군 14곳, 현 41곳으로 67곳의 고을이 편성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거창현을 거창군으로 기록하여 군 15곳, 현 40곳이 되었다.

19세기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따르면 경상감영에는 관찰사와 도사, 심약, 검률 등이 그대로 임명되었다. 단 소속 고을은 부 1곳, 대도호부 2곳, 목 3곳, 도호부 14곳, 군 13곳, 현 38곳으로 71개의 고을이 편성되었다.

18세기의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관찰사는 순찰사를 겸임하며, 2품의 문관이 임명되었고, 임기는 2년이었다. 관찰사 소속으로 계청군관(啓請軍官) 8명, 화사군관(畵師軍官) 1명, 영리(營吏) 65명, 마도(馬徒) 16명, 인리(人吏) 194명, 지인(知印) 112명, 영노(營奴) 111명, 영비(營婢) 76명, 재가병방(在家兵房) 2명, 군관(軍官) 80명, 별장(別將) 5명, 아병천총(牙兵千摠) 3명, 파총(把摠) 6명, 초관(哨官) 41명, 기고관(旗鼓官) 2명, 지구관(知彀官) 2명, 기패관(旗牌官) 141명, 작대파총(作隊把摠) 1명, 초관 5명, 재가백총(在家百摠) 6명, 작령군관(作領軍官) 700명, 별무사좌·우열(別武士左右列) 842명, 도훈도(都訓導) 26명, 사령(使令) 호수(戶首)·보인(保人) 합 160명, 군뢰·화병(軍牢·火兵) 합 55명, 무부(巫夫)·군뢰·화병 합 550명을 두었다. 도사(都事)는 문관 5품으로, 관찰사가 집무하는 곳에서 근무하며, 영리 7명, 마도 4명이 편성되었다. 임기는 1년이다. 한편 중군(中軍)은 무관(武官) 3품으로, 관찰사의 군사 업무를 도와 다스렸다. 병방군관(兵房軍官) 2명, 장무군관(掌務軍官) 2명, 대솔별장(帶率別將) 1명, 출사군관(出使軍官) 90명, 백총 3명, 작령군관 300명, 군뢰 30명이다. 가산외성(架山外城)에는 수첩별장(守堞別將) 2명, 백총 10명, 출사군관 20명, 작령군관 938명, 성정초관(城丁哨官) 18명, 초관 3명을 두었으며, 가산내성(架山內城)에는 천총 2명, 파총 4명, 기고관 1명, 지구관 2명, 기패관 29명, 초관 20명, 도훈도 1명, 작령군관 528명을 두었다. 심약(審藥)은 전의감(典醫監)과 혜민서(惠民署)의 의관(醫官)으로 임명하며, 임기는 15개월이다. 검률(撿律)은 형조(刑曹)의 율관(律官)으로 역시 임기는 15개월이다.

원칙적으로 조선시대 경상도관찰사의 임기는 1년이었다. 하지만 관찰사가 감영 소재 고을의 수령을 겸임할 때는 임기가 2년으로 되었다.

변천

1408년(태종 8)에 각 도의 감사 즉 관찰사는 감영 소재 부윤과 목사를 겸하도록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환원되었다. 1448년(세종 30)에 다시 각 도의 감사가 감영이 있는 주·부의 수령관을 겸임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가, 1454년(단종 2)에 다시 원래대로 복구하였다. 1466년(세조 12)에는 도관찰출척사의 공식 명칭을 관찰사로 개칭하였다. 관찰사라는 명칭은 이후 변화 없이 계속되었다.

고려시대에 경상도관찰사의 본영인 경상감영은 경주와 김주에 번갈아 위치하였으나, 경주에 위치한 기간이 더 길었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 따르면 939년(고려 태조 22)에 동남해도부서가 처음 설치될 때부터 그 본영(本營)은 경주에 있었다. 경주의 본영은 1078년(고려 문종 32)에 김주로 옮겼으며, 이후 경주와 김주에 번갈아 위치하다가 1378년(고려 우왕 4)에 경상감영이 김주에서 경주로 이전한 이래 조선 건국 이후에도 경상감영은 경주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1408년(태종 8)경에 경상감영은 상주로 이전하였다. 1519년(중종 14)에 경상도는 낙동강을 기준으로 하여 동쪽의 좌도와 서쪽의 우도로 분도하였으나, 같은 해에 다시 하나로 통합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다시 좌도와 우도로 분도되어 좌도의 감영은 경주에, 우도의 감영은 상주에 머물게 하여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의 일을 지휘하게 하였으나, 1593년에 하나로 합쳐 감영을 성주 팔거현에 두었다.

1595년(선조 28)에 경상도는 다시 좌도와 우도로 나뉘었다가 1596년에 다시 통합되어 대구에 감영을 설치하였다. 1599년에 감영을 안동부로 이전하였다가 1601년에는 다시 대구로 옮겨 경상도관찰사가 대구도호부사를 겸하게 하고, 판관을 설치하였다. 1676년(숙종 2)에는 대구부사를 겸하는 제도를 폐지하였다가, 1684년(숙종 10)에 다시 부사를 겸하도록 하였으며, 1685년(숙종 11)에는 성주의 화원, 밀양의 풍각 등을 대구에 소속시켰다. 1751년(영조 27)에 경상도관찰사가 대구부사를 겸하는 제도를 폐지하였다가, 1758년(영조 34)에 다시 부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1896년(고종 33)에 경상도를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로 분리하였다. 경상북도는 그대로 대구에 치소를 두고 41개 군을 관할하였고, 경상남도는 진주에 치소를 두고 1개 부 29개 군을 관할하였다.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는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경상도는 조선초기인 15세기에 호수가 42,227호, 인구가 173,759명으로 기록되었으나,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호수 359,840호에 남자 671,842명, 여자 863,871명, 총인구 1,535,713명으로 기록되었으며, 18세기 후반에 발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호수 365,220호에 남자 725,062명, 여자 865,911명, 총인구 1,590,973명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1910년의 상황을 수록한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는 경상북도에 호수 328,947호에 남자 815,565명, 여자 714,999명, 총인구 1,530,564명, 경상남도에 호수 291,592호에 남자 720,907명, 여자 644,172명, 총인구 1,365,079명으로 기록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선생안(慶尙道先生案)』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호구총수(戶口總數)』
  • 변태섭, 『고려 정치제도사 연구』, 일조각, 1971.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사 연구』, 일지사, 1990.
  • 황휘주 외, 『경상감영의 종합적 연구』,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04.
  • 박종진, 「고려시기 안찰사의 기능과 위상」, 『동방학지』122,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