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현(慶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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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 기원하여 현재 경상북도 경산시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경산(慶山)에는 신라시대에 처음 고을이 설치되었다. 경산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1308년(고려 충선왕 즉위)에 충선왕의 이름과 동일하다 하여 장산(獐山)을 경산으로 개명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신라 경덕왕 때 장산군이라 칭하고 3곳의 영현(領縣)을 거느렸다. 고려 때도 장산군이 되어 동경(東京) 즉 경주(慶州) 소속의 속군(屬郡)으로 편성되었다. 1172년(고려 명종 2)에 최초로 감무(監務)가 파견되었고, 1317년(고려 충숙왕 4)에 감무를 현령관(縣令官)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큰 변화 없이 조선시대에도 현령관이 수령으로 파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경산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 경산읍을 경산시로 분리·승격하였으며, 1995년에는 도농통합으로 경산시와 경산군을 경산시로 통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경산현은 압량소국(押梁小國)의 땅을 신라가 차지하고 군을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라 경덕왕 때 장산군으로 개명하였다. 신라 장산군은 9주(九州) 중 양주(良州)에 속하였으며, 해안현(解顔縣)·여량현(餘粮縣)·자인현(慈仁縣)의 3개 영현(領縣)을 거느렸다. 고려시대에도 장산군이 유지되었고,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경주에 내속(來屬)하여 동경 즉 경주의 속군이 되었다. 1172년에 감무를 처음으로 파견하였다. 충선왕이 즉위한 1308년에 고을 이름이 왕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경산으로 고쳤고, 1317년에는 국사(國師) 일연(一然)의 고향이라 하여 현령관을 두었다. 그러나 고려전기의 장산군이 언제 장산현으로 변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는 왕비 노씨(盧氏)의 고향이라 하여 현령관을 지군사(知郡事)로 하고 경산군으로 승격하였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한 1392년(태조 1)에 다시 경산현으로 강등시키고 현령관을 파견하였다.

조직 및 역할

신라시대에 장산군에는 외관으로 태수(太守)가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장산군이 경주의 속군으로 기능하였다. 비록 중앙에서 장산에 지방관을 파견하지는 않았지만, 장산군에는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으며,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의 관할하에 있었다. 장산군에는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를 처음 설치하였고, 이후에는 지방관을 계속 파견하였다. 1308년에 경산으로 개명하였고, 조선시대에는 현령관을 파견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경산현에는 종5품의 현령(縣令)과 종9품의 훈도(訓導)을 파견하였다.

18세기의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종5품의 문관(文官)이나 음관(蔭官)을 현령으로 임명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30명, 인리(人吏) 25명, 지인(知印) 17명, 사령(使令) 14명, 관노(官奴) 41명, 관비(官婢) 46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5품의 현령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경산현은 1601년(선조 34)에 임진왜란의 여파로 인해 대구부(大丘府)에 병합되었지만, 1607년(선조 40)에 다시 복구되었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대구부에 속하여 경산군이 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경산군은 경상북도 소속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조선시대 경산현의 관아가 위치한 곳은 현재 경상북도 경산시 서상동 일원이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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