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지(京山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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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 후기 이원정(李元禎)이 필사한 성주 읍지로서, 경상북도 칠곡군의 풍속, 물산, 고적, 인물, 산악, 지리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개설

향토사(鄕土史)는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나 살고 있는 우리 고을의 역사다. 통치 목적으로 기록된 관찬(官撰)인 ‘읍지’나 ‘호적대장’ 그리고 사족(士族)들에 의한 자기들 가계 중심의 사찬(私撰)은 향촌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실제 역사와는 다소 거리가 멀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이는 역사의 자료는 될지언정 체계적으로 서술된 역사라고는 할 수 없다.

국역 『경산지(京山志)』는 1677년 이원정이 지은 것으로, 당시 팔거현이던 지금의 왜관, 지천, 동명 등 칠곡군의 연혁을 비롯한 군명·성씨·풍속·누정·학교·사묘·인물 등을 기록한 향토 지리지다.

편찬/발간 경위

『경산지』는 16~17세기 사찬(私撰) 읍지가 광범위하게 편찬되었던 시기에 이원정에 의해 편찬되었다. 이 책은 서인계 선현을 모욕하였다는 혐의로 경상감사에 의해, 판목이 불태워졌으며, 그 내용이 중앙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이 책은 1668년경 편찬을 시작하여, 1677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1682년 경상감사이수언(李秀彦)은 이이(李珥)·조헌(趙憲)과 윤두수(尹斗壽)·정철(鄭澈) 등의 선정을 헐뜯고, 또한 김상헌(金尙憲)·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에 대해, 함부로 말을 지어내었다는 혐의로 『경산지』의 판목을 폐기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당쟁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원정은 현종대 예송에서 영남 남인계 인물들이 주도한 상소의 배후 인물로 지목받고 있었다. 또한 1680년 경신환국 이전까지 서인 측으로부터 남인계의 주론자로 간주되었다.

1682년 경상감사이수언은 『경산지』에서 보이는 서인계 인물들에 대한 서술을 의도적인 왜곡으로 간주하였으며, 이것이 파판(破板)과 분훼(焚毁) 요청 등의 장계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수언은 송시열의 제자로, 경상감사에 재직할 때에 영남 지역의 서인계 진출을 크게 도왔던 인물이었다.

1682년 이수언의 『경산지』 파판은 1682년 대구의 서인 거점인 상덕사(尙德祠) 건립과 1681∼1682년 인동 향전에서 남인계 사인(士人)의 치사(致死) 처리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영남 지역 대남인(對南人) 강경책의 소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경산지』의 파판을 가져온 부분은 후일 성주에서 읍지를 편찬하면서, 수정과 삭제를 거치게 되었지만, 이러한 파판(破板)과 분훼(焚毁) 논의가 정치적 배경에서 나왔다는 점은 숙종대 당파를 둘러싼 사상적, 이념적 배타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서지 사항

123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크기는 24×19㎝이며, 14~20행의 행서체(行書體)로 작성되었다. 경북향교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조선 후기의 문신 이원정(李元禎)이 필사한 성주의 읍지로서, 원래 조선 중기의 학자 장현광(張顯光)의 발의로 1635년(인조 13) 처음으로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는 못했다. 이후 합천군수를 지내며, 선정을 베푼 이도장(李道長)이 두 번째로 편찬을 시도하였고, 그의 아들인 이원정이 완성하였다. 목판본 서문의 제작 시기가 1677년(숙종 3)인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작성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책 표지에는 ‘경산지 본초(本草)’라고 쓰여 있으며, 표제지에는 ‘성산지(星山志)’라고 쓰여 있다. 간본(刊本)에 있는 서문이 없고 곳곳에 손을 본 흔적들이 많아 완성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경산지』의 편찬 과정을 살펴볼 수 있고, 성주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하게 이용될 수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국역 『경산지』는 당시 팔거현이던 지금의 왜관, 지천, 동명 등 칠곡군의 연혁을 비롯한 군명·성씨·풍속·누정·학교·사묘·인물 등을 기록한 지리지를 현대문으로 번역한 향토지이다.

『경산지』의 초고본은 이면에 기록이 있는 용지에 필사(筆寫)된 성주의 읍지이다. 간본(刊本)과 비교해 보았을 때 서문(序文)이 쓰이지 않은 상태이고, 내용 서술의 중간중간에 첨삭한 부분이 많은 등 완료되지 않은 초고단계의 사본(寫本)이다. 내용의 체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체제를 모방하였으나, 거기에 없는 각리(各里)와 총담(叢談)이 상세하게 되어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완료되지 않은 초고단계의 사본(寫本)이나, 이원정의 ‘친필 초고본’으로서, 성주의 읍지인 『경산지』 편찬의 과정과 목판본에 누락된 내용을 보완하여 성주·칠곡 지역의 지방사 연구에 활용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참고문헌

  • 한국문화원연합회 경상북도지회, 『경상북도지방문화원 향토사총람』, 한국문화원연합회 경상북도지회, 2007.
  • 박인호, 「성주 읍지 『경산지』의 파판과 그 정치적 함의」, 『한국의 철학』 제58호,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6.
  • 이재두, 「조선 후기 속현 단위 읍지 편찬의 배경과 목적-대구 화원현 읍지 『금성집언』(1788)을 중심으로-」, 『대구사학』 제125호, 대구사학회,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