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전(景思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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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창경궁에 있던 중종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달랐다. 왕은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대체로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경사전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혼전이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경사(景思)’로 정하고(『인종실록』 1년 윤1월 25일), 윤달(윤1월)을 포함하여 5개월 뒤 정릉(靖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 정전 제7실에 부묘할 때까지 경사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

내용 및 특징

1544년 11월 15일 중종이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에서 승하하자 통명전(通明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5개월 뒤인 1545년(인종 1년) 2월 정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인종실록』 1년 2월 9일). 이때 창덕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경사전이다. 경사전에는 중종의 신위만이 아니라 영경전(永慶殿)에 있던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신주도 함께 모셨다.

중종의 혼전은 처음에는 창덕궁의 편전(便殿)인 선정전(宣政殿)에 마련하기로 정하였다. 단, 나중에 졸곡(卒哭)이 지나 인종이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한 뒤 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文政殿)으로 혼전을 옮기기로 했다. 졸곡이 지난 뒤 인종이 창덕궁에 거처했는데 경사전을 선정전에서 문정전으로 옮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다.

경사전으로 반우한 뒤 초우제(初虞祭)부터 졸곡제(卒哭祭)를 여기서 지냈다. 인종이 즉위한 지 1년이 채 되지 못하였는데 승하하여 중종의 국상은 명종에게 넘겨졌다. 명종은 연제(練祭),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를 경사전에서 거행하였다.

1547년(명종 2) 1월 12일 중종과 장경왕후의 신주를 경사전에서 모셔와 태묘에 부묘하였다. 따라서 경사전은 중종과 장경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545년 2월 9일부터 종묘에 부묘한 1547년 1월 12일까지 창덕궁과 창경궁에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경사전이 있었던 창덕궁의 선정전과 창경궁의 문정전은 이후에도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종묘의궤(宗廟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