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봉각(敬奉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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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황제의 어제(御製), 어필 및 조칙(詔勅)을 봉안하던 경희궁과 창덕궁의 전각.

개설

경봉각은 명나라의 조칙을 봉안하기 위해 1769년(영조 45) 경희궁에 건립되었으며(『영조실록』 45년 12월 4일) 이후 정조대 창덕궁의 대보단(大報壇) 옆으로 옮겨졌다(『정조실록』 23년 7월 25일). 대보단은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1704년(숙종 30) 창덕궁에 세운 제단으로 황단(皇壇)이라고도 한다. 조선의 외교는 사대교린이라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 있었으므로 중국에서 보낸 외교문서를 보관하기 위한 전각을 마련한 것이 경봉각이었다.

위치 및 용도

경봉각은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보관하던 경희궁의 건물이며,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인 1774년(영조 50)에는 경봉각 곁에 별도로 전각 한 채를 지어 청나라의 칙서를 봉안했다(『영조실록』 50년 7월 12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 전각의 이름을 봉안각(奉安閣)이라고 하였으므로 경봉각은 봉안각과 나란히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궐도안(西闕圖案)」을 보면 위선당 서쪽이자 궁궐 북서쪽 영역 끝에 봉안각 두 채가 묘사되어 있는데 이곳이 경봉각이 있던 위치이다.

변천 및 현황

1769년(영조 45) 영조는 경희궁에 경봉각을 건립하여 명나라의 조칙을 따로 봉안하도록 하였다. 현판은 영조가 어필로 썼다. 1799년(정조 23) 당시에는 창덕궁대보단 동쪽에 봉실(奉室)이 있었는데, 이때 정조는 대보단 서쪽으로 경봉각을 그대로 옮겨 세웠다. 경희궁의 경봉각은 조선말기부터 경희궁이 훼철(毁撤)되면서 현존하지 못하게 되었다.

형태

1799년(정조 23)에 대보단 부근으로 옮기던 기록에 의하면, 경봉각은 한 칸 집이라고 하였다. 『동궐도(東闕圖)』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69년 영조는 승문원(承文院)에 청과 명의 조칙이 섞여 보관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후 교서관(校書館)에 명해 『추감황은편(追感皇恩編)』을 만들게 하였으며 경봉각과 흠봉각(欽奉閣)에 나누어 봉안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45년 12월 11일). 그 내용이 『경봉각형지안(敬奉閣形止案)』에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경봉각형지안(敬奉閣形止案)』
  • 『동궐도(東闕圖)』「서궐도안(西闕圖案)」『한경지략(漢京識略)』
  • 한국문화재보호협회, 『동궐도』, 문화재관리국, 1991.
  • 한영우, 『창덕궁과 창경궁』, 열화당/효형출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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