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과무과(慶科武科)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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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경과무과 |
한글표제 | 경과무과 |
한자표제 | 慶科武科 |
상위어 | 과거(科擧) |
관련어 | 별시(別試), 정시(庭試), 증광시(增廣試), 가례(嘉禮), 평복(平復), 부묘(祔廟), 존호(尊號),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추(騎芻), 관혁(貫革), 기창(騎槍), 조총(鳥銃), 유엽전(柳葉箭), 격구(擊毬), 편추(鞭芻), 강서(講書) |
분야 | 정치/인사/선발 |
유형 | 법제·정책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노영구 |
시행시기 | 1420년 |
시행기관 | 병조(兵曹)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경과무과(慶科武科)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즉위년 8월 19일, 『숙종실록』 46년 4월 25일, 『영조실록』 16년 윤6월 2일, 『정조실록』 8년 11월 18일 |
조선시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시행하는 비정기의 특별 무과 시험.
개설
조선시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시행하는 비정기 특별 시험인 경과(慶科)의 무과 시험으로서 별시(別試)·정시(庭試)·증광시(增廣試) 등이 있었다. 시험은 초시와 전시의 2단계로 이루어졌다. 선발 인원은 일정하지 않고 왕에게 아뢰어 급제자 수를 정하였다. 시험 과목은 목전(木箭) 등 11과목 중 2~3과목을 정하여 시행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에 왕이 즉위하거나 즉위한 지 30년 또는 40년, 혹은 원자(元子) 혹은 원손(元孫)의 탄생, 왕세자의 책봉과 입학, 또는 왕과 왕세자의 가례(嘉禮), 왕과 왕비의 건강 회복인 평복(平復), 선왕의 부묘(祔廟), 왕이나 왕비 등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등 나라의 경사가 있을 경우 이를 기념하여 특별 과거를 실시하였다. 이를 경과라 하였는데, 매우 특별한 경사가 있거나 경사가 겹칠 때 치르는 증광시, 증광시보다 비중이 낮은 경사가 있을 경우 다소 적은 인원을 선발하는 별시, 그리고 정시 등이 있었다.
내용
경과는 1401년(태종 1)에 태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하여 처음 시행하였는데, 이때 문과·생원시·잡과를 실시하고 무과는 제외하였다가, 무과는 1402년(태종 2)에 처음 시행하였다. 이후 1419년(세종 1)에 세종의 즉위를 경축하여 이듬해 실시한 증광시부터 문과와 무과를 함께 실시하였다(『세종실록』 즉위년 8월 19일). 이 시기에 실시한 증광무과는 식년무과와 같이 시험 절차나 선발 인원 등에서 큰 차이가 없어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를 거쳐 28명을 선발하였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또 다른 경과인 별시는 문과와 무과만 실시하였으며 시험 절차도 초시와 전시의 2단계만 있었다. 이때의 초시는 식년시의 복시에 해당하였다. 별시는 보통 한성에서만 실시하였으며, 뽑는 인원도 일정하지 않았고, 당시의 상황에 따라 정해졌다. 별시에는 왕이 지방으로 행차할 때 지역 주민들을 위로하고 인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시행하는 외방별시(外方別試)도 있었지만 나라의 경사를 기념하여 실시하는 경과와는 성격이 달랐다.
정시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경과의 하나로서 증광시 등에 비하여 큰 경사가 아니지만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였다. 예를 들어 1720년(숙종 46)에는 동궁(東宮)이 홍진(紅疹)에서 회복한 것을 계기로 정시를 시행하였다(『숙종실록』 46년 4월 25일). 원래 정시는 매년 봄가을에 성균관 유생을 전정(殿庭)에 불러들여 시험을 보여 우수한 사람에게 전시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거나 급분(給分)하던 특별 시험이었다. 그러나 1583년(선조 16)에 정식 과거 시험의 하나로 승격되었다. 정시는 선발 인원을 정하지 않고 왕에게 아뢰어 결정하였다.
경과무과의 시관(試官)은 각 시험장인 소(所)마다 3명으로서 2품 이상의 문관 1명과 무관 2명으로 선발하였다. 참시관(參試官)은 당하 문관 1명과 무관 2명을 두었다. 시험을 감독하는 감시관(監試官)도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인 1명씩을 두었다. 시험 과목은 목전· 철전(鐵箭)·편전(片箭)·기추(騎芻)·관혁(貫革)·기창(騎槍)·조총(鳥銃)·유엽전(柳葉箭)·격구(擊毬)·편추(鞭芻)·강서(講書) 모두 11가지 과목으로 왕의 낙점을 받아 2~3과목을 정하였다.
변천
조선전기에는 증광시와 별시를 시행하였으나 후기에는 증광시와 정시를 시행하였다. 경과무과 중 정시는 조선후기에 시행 횟수가 매우 많았을 뿐만 아니라 선발 인원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1740년의 경과무과 초시의 경우에는 5명을 뽑도록 명하였으나(『영조실록』 16년 윤6월 2일), 1784년(정조 8) 세자 책봉에 대한 경과무과에서는 2,676명의 무사가 합격하였다(『정조실록』 8년 11월 18일). 무과 급제자를 많이 배출함으로써 하위 계층 출신 무사들이 다수 급제하게 되자 점차 무과가 천시되어 사족 자제들은 무반이 되는 것을 꺼리기도 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과거제를 혁파하면서 경과무과도 아울러 폐지하였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무과총요(武科總要)』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1994.
- 심승구, 「조선초기 무과제도」, 『북악사론』 1, 1989.
- 정해은, 「조선후기 무과급제자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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