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첩(揭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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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명 관계에서 자문(咨文) 대신 실무 차원에서 사용되었던 외교문서.

내용

명대에 체문(帖文)은 상행문서인 게첩(揭帖), 하행문서인 첩하(帖下) 등이 있었다. 게첩은 공문 가운데 가장 간략한 내용을 포함하는 것으로 주로 3품 이상 관청에서 사용하고, 첩하는 3품 이하 아문에서 하급아문에 하달한 낮은 등급의 실무적인 문서였다. 게첩의 형식은 “某府爲某事(云云)(모부위모사(운운)) 合下仰照驗(云云)須至帖者(합하앙조험(운운)수지첩자)”으로 되어 있으며, 첩문임을 밝히는 ‘첩(帖)’ 자를 문서 말미에 크게 적었다.

조·명 관계와 관련하여 사례감이 게첩을 예부로 하달하면 예부에서는 해당 내용을 조선에 보내는 칙서에 옮겨 적었다. 조선의 경우 초기에는 게첩의 사용 용례가 적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파병된 명군과 조선 사이에서 게첩이 빈번히 사용되었다. 이 당시 게첩은 조·명 상호간에 간단한 정보와 의견의 교환을 위하여 실무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선조의 명으로 왕이 명군에 보내는 게첩에는 어보를 찍었다. 이 문서는 청대에 널리 활용되었다. 게첩은 조선과 중국 사이에 왕래한 실무 외교문서로, 격식을 갖춘 외교문서에서 보기 어려운 현실적인 상황과 구체적인 외교 교섭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용례

該司禮監太監魏彬於左順門 遞出揭帖一本內開 賞賜朝鮮國王王妃及養老王王妃竝世子 銀兩紵絲蟒衣等件數目到部節 連催取手本 送翰林院寫勑[『中宗實錄』 16년 7월 6일 1번째기사]

참고문헌

  • 『대명회전(大明會典)』
  • 김경록, 「명대 공문제도와 행이체계」, 『명청사연구』 2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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