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청궁(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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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대 경복궁 중건 이후 향원지 북쪽의 신무문 앞에 조성한 궁궐 내의 별궁.

개설

고종대 경복궁의 중건이 일단락된 후 1873년(고종 10)에 왕실의 내탕고(內帑庫)로 외부에 알리지 않고 건청궁 일곽이 조성되었다(『고종실록』 10년 5월 10일). 고종은 궁궐 내에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자신의 어진(御眞)을 봉안하는 곳이라고 건립 목적을 내세웠으나 나중에는 어진 봉안보다는 주요 거처, 집무처, 외교사절을 맞는 장소로 사용했다.

민간의 사대부 집과 같이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65칸 규모로 장안당(長安堂)과 곤녕합(坤寧閤)이 중요 건물이다. 고종 집권 중반기 이후의 중요한 정치적 장소이며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된 현장이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 중심축 선상의 향원지(香遠池) 북쪽에 있다. 북쪽 궁장(宮墻)에 접해 있어서 경복궁 내 가장 깊숙한 위치에 해당한다. 건청궁이라는 명칭은 중국 명·청대 황제의 침전 일곽과 이름이 같고 곤녕합은 황후의 거처인 곤녕궁에서 딴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각의 명칭과 함께 건물의 구성이 민간의 사대부 집과 같고, 왕실의 내탕고로 외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공사를 진행했으며, 신하들이 이를 알게 되자 창덕궁의 서향각(書香閣)을 예로 들어 어진을 둘 전각이라고 한 점(『고종실록』 10년 8월 19일) 등으로 추정하자면 건청궁의 건립 목적은 별궁으로서 고종이 자신의 어진과 어필, 서책 등을 가까이 두면서 정치활동 공간으로 사용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건립 당시 신하들에게 밝힌 중요한 용도로서 건청궁에 모시기로 했던 고종의 어진은 1872년(고종 9)에 제작하였다. 이 어진은 처음에는 수정전(修政殿)에 봉안했으나(『고종실록』 12년 5월 28일) 1875년(고종 12) 이후 고종이 경복궁에 있는 동안은 건청궁 일곽에 있는 관문각(觀文閣)에 봉안하게 되었다(『고종실록』 12년 9월 3일). 이후 화재로 인하여 내전 일곽의 전각이 소실되자 고종은 창덕궁에 머물렀는데, 갑신정변을 겪은 후에는 경복궁의 복구가 완료되지 않았는데도 1885년(고종 22) 그쪽으로 옮겨갔다. 강녕전(康寧殿)과 교태전(交泰殿), 자경전(慈慶殿) 등 주요 침전 전각이 복구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왕실의 웃전과 왕 내외, 세자 내외 등이 거처할 내전의 전각은 부족했다. 따라서 왕과 왕비는 건청궁에서 주로 거처하게 되었다. 건청궁은 사대부 집의 사랑채에 해당하는 장안당과 안채 성격의 곤녕합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처럼 내외의 구분이 명확하였으므로 외부 인사를 만나는 일과 일상적인 거처로써 편리한 점이 있었다.

변천 및 현황

건청궁 공사가 표면화된 것은 1873년(고종 10) 5월 부호군(副護軍) 강진규(姜晉奎)가 상소를 올리고 좌의정 강로(姜㳣)가 국왕과 소대하는 자리에서 건청궁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부터이다(『고종실록』 10년 5월 10일). 신하들이 반대하자 고종은 건청궁의 준공 의사를 분명히 하고 같은 해 12월 이전에 완공되었다.

건청궁 건립 당시의 기록을 보면, 장안당의 정문인 초양문(初陽門)과 장춘실(長春室), 관문당(觀文堂)이라는 당호의 건물이 나타난다. 이후 건청궁 일곽에 큰 변화는 없었으나 다만 관문당에 어진을 봉안하면서 관문당을 관문각으로 당호를 바꾸고, 한식 건물이던 것을 1888년(고종 25) 양식 건물로 고쳐지었다. 관문각에 있었던 어진과 장서는 양식 건물로 다시 지은 후 집옥재(集玉齋)로 옮겼다.

1896년(고종 33) 경복궁에 무단 침입한 일본인들이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난 후 건청궁은 주인을 잃었다. 건청궁이 헐린 경위와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1908년(융희 2)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건청궁이 ‘현존’으로 기록되어 있고, 1909년(융희 3) 6월 25일자 『대한민보(大韓民報)』 기사에는 이미 건청궁이 헐렸다는 것을 시사하는 내용이 있으므로, 1908년에서 1909년 6월 사이에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건청궁이 헐린 후 그 자리는 계속 비어 있다가 1939년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어 개관했다. 해방 후에도 이 미술관은 민속 박물관, 한국 전통 공예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이 미술관 건물은 1998년 경복궁 복원 정비 계획에 의하여 철거되었고 2006년 다시 그 자리에 건청궁 일곽을 복원했다.

형태

건청궁 일곽은 담장과 행각으로 둘러싸여 하나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곳은 다시 다섯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고종이 신하와 외국 공사들을 만나던 장안당,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 고종의 어진과 서책을 보관했던 관문각, 건청궁 (외)행각, 복수당(福綏堂)이다. 정문은 외행각에 있는 솟을대문이며 별도의 문 이름은 없고 ‘건청궁’이라고만 되어 있다. 문 안쪽에는 장안당의 정문인 초양문과 내행각이 있다.

장안당은 고종이 건청궁에 거처하던 시기에 신하들과 외국 공사들을 만났던 건물이다. 장안당에는 대청 3칸과 동·서 온돌방이 있으며 서온돌의 정면에는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라는 2칸 규모의 누마루가 있었다. 서온돌은 북쪽으로 침방(寢房)을 두고 있으며 침방은 정화당(正化堂)이다.

곤녕합은 대청 2칸과 동온돌 2칸, 누마루, 침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누마루는 옥호루(玉壺樓)와 사시향루(四時香樓)이고 침방은 정시합(正始閤)이다. 곤녕합의 동·서·남·북쪽에는 행각이 있는데 남행각의 출입문은 함광문(含光門), 동행각의 출입문은 청휘문(淸輝門)이다. 서행각은 남쪽 끝에서 장안당의 복도각과 연결되어 있어서 장안당에서 곤녕합으로 통행이 가능하다. 곤녕합 북행각의 북쪽에는 복수당, 서쪽에는 녹금당(錄琴堂) 등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

장안당 뒤뜰에는 원래 한식 건물이었던 관문각이 있었는데 이곳에 고종의 어진을 비롯하여 책보와 보인(寶印), 서책을 보관했다. 1888년 기존의 관문각을 헐고 양식 건물로 다시 지었다. 장안당 서쪽에는 행각이 없고 담장으로 되어 있으며 밖에서 장안당으로 들어오는 문은 필성문(畢星門)으로 벽돌로 된 홍예문이고, 관문각으로 들어오는 문은 관명문(觀明門), 그 북쪽에 있는 문은 취규문(聚奎門)이다.

건청궁은 북쪽이 내궁장에 접해 있고 내궁장 바깥쪽으로 순라길과 외궁장이 있는데 각각의 동쪽과 서쪽에 문이 있다. 외궁장에는 건청궁의 동쪽에 계무문(癸武門), 서쪽에 1876년 새로 지은 광무문(廣武門)이 있고, 내궁장에는 동쪽에 무청문(武淸門) 서쪽에 무녕문(武寧門)이 있다. 외궁장문은 홍예문이고, 내궁장문은 사주문이다.

건청궁의 남쪽에는 향원지가 있는데 이 연못은 전체적으로 네모난 형태를 띠고 있으며 모서리는 둥글다. 연못 중앙에는 둥근 섬이 있고 그 섬에는 향원정(香遠亭)이라는 2층짜리 육각형 정자가 있다. 건청궁 쪽에서 향원지까지는 목조 다리인 취향교가 있다. 조선전기부터 이곳에는 연못이 있었으나 향원정과 취향교는 건청궁을 지을 때 같이 새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향원지 영역으로 출입하는 서쪽 문은 건선문(建善門)이고 그 남쪽에는 평락문(平樂門)이라는 일각문이 있다. 동쪽에는 녹산(鹿山)으로 통하는 인유문(麟遊門)과 봉집문(鳳集門)이 있고, 내전 일곽으로 통하는 청향문(淸香門)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종이 신하들도 모르게 왕의 내탕고로 건청궁을 지었으며 신하들이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공사가 거의 끝나가던 때라서 크게 반대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건청궁이 완공되는 시점과 고종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영향을 벗어나서 친정(親政)을 선언하는 시기가 일치하여 그 건립 과정을 고종의 정치적인 성장과 관련 있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건청궁은 1885년 이후부터는 왕의 주요 거처가 되었다. 개항 이후 신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은 1887년(고종 24) 조선에서 처음으로 건청궁에 전등을 설치하였다. 이 전등은 16촉광의 백열등이었으며, 750개를 점등하였고 연료로는 석탄을 사용했다고 한다. 전등을 밝히기 위한 발전소는 처음에는 향원지 남쪽에 있었으나 나중에는 관문각 북쪽 행각으로 옮겼다. 궁궐 내에 지은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은 러시아인 사바틴([沙婆眞, 薩巴丁], Sabatine, A.S.)이 설계와 시공에 관여했다. 고종은 사바틴을 신임하여 외국인 다이([茶伊], Dye, W.McE.), 닌스테드([仁時德], Neinstead, F.H.)와 함께 궁궐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사바틴은 을미사변 당시 현장을 목격한 외국인 목격자가 되었다.

건청궁에서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새벽 일본인들이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이다. 이 사건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계획한 것으로, 일본이 조선의 정국을 주도하려고 하면서 그에 가장 방해가 되던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경성 주재 일등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는 사건 직후 직접 현장을 조사한 다음 보고서를 작성하여 1895년 12월 21일 본국에 보고했는데, 이 보고서에는 일본인들이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소가 있던 건청궁에 침입한 경로가 상세히 나타나 있다. 이들은 한국인 동조자들의 안내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으로 침입하여 경회루 왼쪽을 지나서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 진거문(辰居門)→유형문(維亨門)→광림문(廣臨門)→건선문(建善門)을 통해 건청궁으로 들어갔는데, 이 경로는 평상시 건청궁의 출입 동선과 일치한다. 이후 이들은 곤녕합의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하여 시신을 녹산에서 불태웠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고종은 친일 정권에 둘러싸여 경복궁에 유폐되다시피 하였다. 이에 고종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을 단행했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경운궁으로 이어하면서 경복궁으로 환어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김태중, 「開化期 宮廷建築家 사바찐에 관한 硏究」, 『대한건축학회논문집』12권 7호, 1996.
  • 명성황후 추모사업회, 『명성황후 시해사건 러시아 비밀문서』, 서림재, 2005.
  • 문화재청, 『경복궁 건청궁 중건보고서』, 문화재청, 2006.
  • 서영희,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 이민원,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 국학자료원, 2002.
  • 한국전력공사, 『한국전기100년사』(上), 한국전력공사, 1989.
  • 이혜원, 「경복궁 중건이후 전각구성의 변화 -「경복궁배치도」와 「북궐도형」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조선일보』, 2005년 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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