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원보(乾元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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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경원부에 속한 진보.

개설

건원보는 세종대에는 만호(萬戶)가 파견되었으나, 조선중기부터 종9품의 수장(守將)인 권관(權管)이 파견되었다. 1583년에 건원권관으로 근무하던 이순신이 ‘니탕개(尼湯介)의 난’을 처음 일으킨 경원의 번호(藩胡)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유인하여 목을 벤 곳이기도 하다. 이후 고종대에 혁파되어 아산(阿山)에 합쳐졌다.

위치 및 용도

건원보는 지금의 함경북도 경원군 고건원 노동자구 일대이다. 동쪽에 마요봉, 북서쪽에 사소봉과 해돋이봉이 있으며 남쪽으로 오룡천이 흐른다. 조선초기 6진 개척 과정에서 두만강 강변의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다.

변천 및 현황

1436년(세종 18) 11월에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김종서가 요해지의 소보(小堡)에 대해 보고하면서 건원을 나단월하령(羅丹月下嶺)으로 물려서 쌓았다고 한다(『세종실록』 18년 11월 1일). 한편, 조선이 1440년에 6진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건원만호(萬戶)를 후훈탄변(厚訓灘邊)에 옮겨서 설치하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후훈탄변으로 옮기는 대신 아산장(阿山場)으로 옮기는 것으로 결정되었다(『세종실록』 23년 5월 19일).

이후에도 건원보를 두만강변인 오롱초수동(吾弄草水洞)으로 옮겨 설치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강변으로 옮기면 방어하는 군사를 더 많이 두어야 한다는 이유로 수용되지 않았다(『중종실록』 4년 10월 18일) (『중종실록』 16년 9월 16일).

건원보는 조선말까지 유지되었으나, 1883년 11월에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어윤중(魚允中)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관북(關北) 지방에서 중요하지 않은 각 진보(鎭堡)를 통합할 때 아산에 합쳐지며 진보의 기능을 상실하였다(『고종실록』 20년 11월 23일).

형태

1490년에 둘레 1,600척(약 485m), 높이 7척(약 2m)의 성을 건원보에 쌓았다(『성종실록』 21년 10월 30일).

관련사건 및 일화

1583년 1월부터 7월까지 6진 지역의 번호들이 반란을 일으킨 ‘니탕개의 난’이 일어났다. 이것은 경원의 번호 우을기내가 선동하여 일으킨 것으로, 초반 경원성이 함락당하는 등 경원 지역이 큰 피해를 보았다. 그 과정에서 적이 건원보도 포위하였는데, 부령부사(富寧府使)김의현 등이 힘껏 싸워 물리쳤다. 그리고 그해 7월 당시 건원권관으로 근무하던 이순신 등이 우을기내를 유혹하여 건원보 앞으로 끌고 와서 목을 베었다(『선조수정실록』 16년 2월 1일) (『선조실록』 16년 7월 10일).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제승방략(制勝方略)』
  • 『국조보감(國朝寶鑑)』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여지도서(輿地圖書)』
  • 『성호사설(星湖僿說)』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계갑일록(癸甲日錄)』
  • 『북관지(北關誌)』
  • 『관북읍지(關北邑誌)』
  • 『북로기략(北路紀略)』
  • 송우혜, 「조선 선조조의 니탕개란 연구」, 『역사비평』72, 2005.
  • 윤호량, 「선조 16년(1583) ‘尼湯介의 난’과 조선의 대응」, 『군사』8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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