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가퇴(件加退, 件加堆)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두만강 이북에 위치한 여진족의 군사 거점.

개설

1605년(선조 38)에 오랍(烏拉)의 포점태(布占泰)가 두만강 유역의 6진을 공격할 때 주둔하였던 군사 지점이었다. 1605년 5월에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김종득이 건가퇴(件加退)에 주둔한 포점태군을 공격하였다가 패배하였다.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관련 사료를 통하여 현재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연길시(延吉市) 일대로 보인다.

위치 비정

건가퇴의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 쉽지 않지만, 실록에서는 조선의 국경에서 거리가 130여 리(약 51.1㎞)라고 하였다[『선조실록』 38년 4월 6일]. 현재의 길림성 길림시(吉林省) 일대에 근거지를 두었던 포점태가 6진의 동관진(潼關鎭)으로 가는 길에 길목인 건가퇴에 주둔하였다. 이를 토대로 현재의 함경도 종성에서 130리 지역의 위치를 추적하면 현재의 길림성 연길시 일대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록

1600년대에 접어들며 오랍의 포점태가 조선과 두만강 유역의 번호(藩胡)를 공격하였다. 이후 포점태는 1605년 3월에도 동관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군대를 조선의 국경에서 약 130여 리 떨어진 건가퇴에 주둔하며 번호 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에 함경북도병마절도사김종득은 건가퇴에 주둔한 적의 수가 많지 않다며 공격을 주장하였다[『선조실록』 38년 4월 6일][『선조실록』 38년 4월 8일].

김종득은 홀라온에게 길을 인도한 이항(伊項) 부락 등을 정벌하여 무위를 보이자, 자신감을 가지고 건가퇴에 주둔한 포점태군을 공격하자고 주장하였다[『선조실록』 38년 4월 21일]. 한편, 포점태군은 조선의 반격에도 위축되지 않고, 계속 번호를 공략하였다. 조선군은 포점태가 그해 4월 7일에 추가 병력 150여 명을 건가퇴에 보내 번호 부락과 조선을 도적질할 계획이라는 첩보를 탐지하였다[『선조실록』 38년 4월 25일].

포점태군이 조선과 주변 번호를 공격하자 북병사김종득은 건가퇴 공격을 결심하고, 준비가 다 되었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김종득뿐만 아니라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서성도 그의 의견에 동조하며 조선의 정벌 분위기를 조장하였다. 다만 비변사는 건가퇴를 공격하자는 의견에 동감하나 일단 시기를 조절하자고 주장하였다.

김종득은 1605년 5월에 약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건가퇴를 공격하였다[『선조실록』 38년 5월 19일][『선조실록』 38년 5월 20일][『선조실록』 38년 5월 22일][『선조수정실록』 38년 5월 1일]. 그러나 조선군은 적 100여 기의 돌입에 패하였다[『선조수정실록』 38년 5월 1일][『선조실록』 38년 7월 26일].

포점태는 건가퇴 전투의 승세를 타고 조선을 더욱 압박하였다. 1605년 7월에 포점태 휘하의 자을고사(者乙古舍)는 온성에서 50리쯤 되는 가홍(家洪) 부락에 머물면서 직첩(職牒)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협박하였다. 그해 8월에 자을고사가 철병하였지만, 상장개(商將介) 등이 1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건가퇴에 머물며 직첩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선조실록』 38년 7월 5일][『선조실록』 38년 7월 6일][『선조실록』 38년 7월 7일][『선조실록』 38년 8월 19일]. 결국, 조선 조정은 논의 끝에 직첩을 내려 주기로 하였다. 이처럼 건가퇴 전투는 포점태가 조선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는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서병국, 『宣祖時代女直交涉史硏究』, 교문사, 1970.
  • 稻葉岩吉, 「淸初の疆域」, 『滿洲歷史地理』 2,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1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