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사(巨文島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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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고종 22)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한 사건.

개설

1845년 영국은 거문도를 해밀턴 항(port Hamilton)이라고 하였다. 1875년 일본 주재 영국공사 파크스(Harry S. Parkes)는 외무성에 일본과 러시아가 합심하여 거문도를 점령할 것이라는 정보를 보고하였다. 또한 1884년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한 투르키스탄을 합병하고 1885년 3월 영국이 훈련시킨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전멸시킨 일이 발생하였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에 위협을 느끼고 러시아 극동함대의 기지인 블라디보스토크[海蔘葳]를 공격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 거문도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결국 4월 11일 영국 의회에서 거문도 점령을 결정하였고 4월 14일 영국 해군성은 나가사키[長奇]에 머물고 있던 영국 동양함대 미국도웰(W. Dowell)에게 거문도 점령을 명하였으며 4월 15일 아가멤논·페가수스·파이어브랜드 등 3척의 군함이 617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거문도에 상륙하였다. 영국군은 영국기를 게양하고 섬 안에 대포 진지와 병영 등을 만들고 항만에는 기뢰까지 부설하여 거문도를 군사기지화 하였다. 당시 청은 러시아에 대한 방비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으려는 목적으로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배후에서 인정하였다. 반면 조선 정부는 주청 영국공사에게 항의하는 한편 조선 주재 미국· 독일·청국· 일본의 각 공관에 영국의 불법점령 사실을 연락하여 외교적 해결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때 영국은 거문도를 영국해군의 석탄을 공급하는 급탄지로 임차하고 싶다는 교섭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과 러시아 간의 긴장이 해결되었고, 청국의 중재에 따라 만약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한다면 러시아는 조선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협약이 이루어져 영국군은 거문도에서 철수하였다.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1887년 2월 5일로 22개월간 점거한 뒤 철수한 것이다.

역사적 배경

영국과 러시아가 세계의 제패를 놓고 벌인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결과였다. 러시아는 흑해 연안의 크림반도를 통하여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시도가 영국에 의하여 제지당하자, 인도 북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진출 시도를 하여 영국으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영국은 일본과 조선, 나아가 홍콩까지 진출하려는 러시아의 해군기지인 블라디보스토크를 경계하기 위하여 거문도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발단

영국과 러시아의 제국주의 정책이 아시아에서 서로 충돌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영국의 침략 행위였다.

경과

1885년 3월에 북경 주재 영국서리흠차대신(署理欽差大臣) 1등참찬(一等參贊) 오코너[歐歐格訥, Oconnor]가 거문도 점령 사실을 조선의 교섭통상사무아문(交涉通商事務衙門)의 독판(督辦)에게 조회(照會)하면서 알렸다(『고종실록』 22년 3월 10일). 또한 청국의 북양대신 이홍장도 편지로 고종에게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알렸다. 이홍장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함대가 홍콩을 침략할 것을 두려워한 영국이 그 중간 기점인 해밀턴[哈米敦], 즉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거문도가 청국 위해(威海)의 지부(之罘), 일본의 대마도(對馬島), 조선의 부산(釜山)과 근거리에 위치해 요충지라고 하면서 정여창의 북양함대를 보내어 거문도를 측량하고 조선과 협력하겠다고 하였다(『고종실록』 22년 3월 20일). 청국에 이어 일본의 대리공사(代理公使) 곤도 모토스케[近藤眞鋤]도 김윤식(金允植)에게 거문도는 조선의 국권(國權)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라면서 세계 각국에 영국이 이 섬을 차지한 것은 조선에서 허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야 각국의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고종실록』 22년 3월 29일).

조선 정부는 거문도가 영국군에 의하여 점령된 사실을 알게 된 뒤 청국 함대의 협조로 거문도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실상을 파악하였다. 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의정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 엄세영(嚴世永)과 교섭통상사무협판(交涉通商事務協辦)묄렌도르프([穆麟德], Möllendorf, Paul George von)는 영국이 거문도에 깃발을 세워 놓은 것은 사리에 맞지 않으며, 분쟁을 일으키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고종실록』 22년 4월 3일). 그런데 당시 조선에 주재하던 유럽 제국들의 외교관들은 한결같이 영국의 입장을 옹호하고 조선 정부에게 영국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도록 권고하였다. 예를 들면, 독일의 총영사(總領事)젬브쉬([曾額德], Zembsch)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보낸 회답 편지에서 영국이 거문도에 잠시 가서 지키려고 한 것은 영국이 다른 나라와 분쟁이 생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고종실록』 24년 4월 8일). 또한 미국의 대리공사푸트([福德], Foote, Lucius Harwood)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보낸 회답 편지에서 영국이 거문도를 영원히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며 영국 정부도 이 섬을 이용하자는 의사가 없다고 하면서 러시아가 만약 영국에서 거문도를 점령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남하의 의지를 접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조선 정부가 블라디보스토크 해군사령장관(海軍司令長官)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런 내용을 알릴 것을 권유하였다(『고종실록』 22년 4월 10일). 이와 같이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일에 대한 국제 여론은 대부분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영국의 행위를 옹호하고 조선 정부가 묵인하길 바라는 모습이었다. 조선 정부도 영국과 러시아간의 거문도 사건을 국제적 분쟁으로 보지 않고 단지 국지적인 일로 여겼다. 더욱이 조선 정부에서는 청국이 외교적으로 영국을 비난하여 거문도에서 영국 해군이 철수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에 따라 감사의 자문을 보내기도 하였다(『고종실록』 24년 4월 17일). 결과적으로 거문도 사건은 조선 정부의 외교적 한계와 강대국의 비정함을 잘 보여 주는 사례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