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급(擧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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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 관서 지방에서 환곡이 많아지자 진분곡을 분급하기 위하여 가호(家戶)의 등급을 나누어 강제로 나누어 준 행위.

개설

분급되는 환곡의 양은 원하는 자를 선정하여 곡물을 받을 자와 받고자 하는 곡물의 양을 헤아려 비교한 후 결정되었다. 환곡으로 대상자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곡물은 창고에 남겨야 하는 유고곡(留庫穀)과 나누어 주어야 할 분급곡(分給穀)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한편 환곡의 모곡을 회록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관청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관청은 좀 더 많은 경비를 확보하기 위하여 환곡의 총량을 늘렸으며, 가능하면 많은 양의 곡물을 분급하려 하였다. 요컨대 관청이 보유하고 있는 곡물 중 분급곡의 비율을 늘리려 하였다.

기존의 환곡 분급 방식으로는 환곡을 고을 백성들에게 분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보다 효율적으로 분급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방법을 찾았다. 결국 환곡을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관계없이 해당 지역에 사는 모든 호(戶)에게 강제로 환곡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를 거급이라 하였다. 거급은 세(稅)도 아닌 환곡을 세금의 방식과 같이 부과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이와 같은 운영 방식에 대하여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해결책을 호소하였고 중앙에서도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 및 특징

1. 환모(還耗)의 회록

환곡은 원래 원하는 자를 대상으로 곡식의 양과 식구 수를 헤아려 몇 차례에 걸쳐 일정한 양을 지급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은 호와 토지를 대상으로 하면서 대상물의 규모 정도에 따라 분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도 원칙적으로 원하는 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거급과 같은 현상에는 환곡 운영의 변화가 내재해 있었다. 재정을 보충한다는 명목 하에 회록법을 도입하여 관청마다 환곡을 늘렸으며, 환곡을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분류(分留) 방식의 다양화를 꾀하였다.

2. 진분화

환곡의 회록을 통하여 많은 기관들이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곡물을 늘리어 갔으며, 또 늘어난 곡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환곡의 진분화를 꾀하였다. 진분화란 통상(보통) 유치분과 분급분의 비율이 정해져 있었는데 이를 무시하고 모두 분급하는 것을 말한다. 감영을 비롯한 지방관청의 곡물들이 진분화되면서 18세기 환곡의 양은 급속도록 증가하였다. 관청에서 보유하고 있는 환곡 중에서 진분조(盡分條)가 늘어남에 따라 환곡의 모곡은 더욱 늘어났고, 그에 따라 분급해야 할 곡물의 양도 늘어났다.

3. 강제적인 분급 방식

분급해야 할 곡물은 원래 원하는 자만을 선정하여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곡물을 보다 많이 분급하기 위해 지역 내의 모든 호를 대상으로 삼아 등급을 매기고 본인이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강제로 분급 대상에 포함시켰는데, 이를 거급이라 하였다.

4. 거급의 사례

1790년(정조 14)에 관서 지방의 암행어사로 파견된 이면응(李冕膺)이 서계(書啓)로 거급으로 인한 문제점을 보고함으로써 조정에서 논의가 시작되었다. 구성(龜城)에서 거급이 발생하였는데, 이때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급이 크게 문제가 된 것은 1799년(정조 23)에 의주(義州)에서 환곡을 강제로 나누어 준 일 때문이었다. 기존에 환곡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일부 지역에서는 호수(戶數)에 따라 대(大)·중(中)·소(小)로 구분하여 분배하는 곳도 있었으나, 의주에서는 처음에 원하는 자를 뽑아 식구 수를 계산하고 곡식을 헤아려 한 달에 3번 정도 간격을 두어 환곡을 나누어 주었으며, 대·중·소로 구분하여 등급을 달리하는 방법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분곡이 많아지면서 환곡을 받기를 원하는 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호의 등급을 나누고, 등급에 따라 강제로 나누어 주는 형태로 바뀌면서 문제가 되었다.

백성들이 문제로 삼은 거급은 강제로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었다. 조정은 이에 대하여 사실을 조사한 후, 주된 원인으로 진분곡을 지목하였다. 그리고 진분곡을 줄이기 위해 진분조를 반은 남겨 두고 반은 나누어 주는 반류반분하는 방식을 논의하였다. 의주에서 곡식 중 반을 유치하고 반을 나누어 주는 것은 군향(軍餉)과 상평곡(常平穀)뿐이었으며, 기타 각 아문의 곡식은 모두 진분조였다.

의의

조선후기 환곡은 수많은 폐단들을 낳으면서 제도적인 개혁이 요청되었다. 환곡은 원하지 않는 자는 분급 대상에 포함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급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분급 대상자로 삼았다. 이는 진휼을 목적으로 하던 환곡이 부세나 다름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세의 부과는 법적인 근거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환곡은 세의 범주에 포함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세와 같이 운영됨으로써, 거급은 환곡이 부세화하는 과정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공거문(公車文)』
  • 『서계집록(書啓輯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