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군(价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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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개천군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개천군(价川郡)은 조선 태종 때 개주(价州)를 개천군으로 바꾼 뒤 그대로 유지되다가 1895년(고종 32)에 평양부 개천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개천군은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서북면의 안주(安州)와 마주 보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살수대첩으로 수나라 군대를 격퇴하였고, 고려시대에는 거란군의 침입을 물리쳤던 군사적 요충지이다. 고려시대에는 종4품의 지주사(知州事)를 두어 다스리다가, 조선이 건국한 후 1406년(태종 6)에 지방관서와 관리의 칭호를 개정할 때 지주사를 지군사(知郡事)로 개칭하고, 1413년에는 행정구역 이름을 개천으로 바꾸었다. 1466년(세조 12)에 관제 개편에 따라 지군사를 종4품의 군수로 바꾸었다. 1413년(태종 13)에 개주에서 고을 이름을 개천으로 바꾸면서 설립되었고, 조선후기까지 유지되다가 1895년에 평양부 개천군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군수와 훈도(訓導) 각 1인을 두었으나 이후에 훈도를 폐지하였다. 군수는 관찰사의 지휘를 받으며 한 군의 행정·사법·군사권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였고, 훈도는 교관으로 지방 향교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삭주도좌익병마(朔州道左翼兵馬)를 겸하다가 이후에는 성천진관(成川鎭管)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겸임하였다. 조선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개천군 소속 관원으로는 좌수 1명, 별감 2명, 창감관(倉監官) 8명, 고감(庫監) 5명, 중군 1명, 병방군관 4명, 기고관 6명, 장별군관 6명, 아전 28명, 통인(通引) 18명, 사령 12명, 군뢰 12명, 관노 33명, 관비 19명이 있었다.

변천

개천군은 고려시대에 조양현(朝陽縣)으로 부르다가 1018년(고려 현종 9)에 연주방어사(連州防禦使)로 승격하였다. 뒤에 다시 조양현으로 환원시켰다가 1227년(고려 고종 14)에 거란의 군사를 막은 공이 있으므로 익주방어사(翼州防禦使)로 고쳤으며, 뒤에 개주로 고쳤다. 조선이 건국한 이후 1413년에 종2품의 관리가 파견되는 고을 이외의 지명에 주(州) 자를 가진 고을을 대상으로 지방행정구역을 개정할 때 군현 이름 가운데 주 자가 있는 지명은 산(山) 자나 천(川) 자로 바꾸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3년 10월 15일). 이때 옛 이름 개주에서 개천군으로 바꾸었다. 1457년(세조 3)에 영변에 진(鎭)을 설치하고 박천, 덕천, 은산, 맹산, 희천 지역과 함께 영변진에 속하였다가 후에 성천진관 소속이 되었다. 1466년에 관제 개편을 하면서 지군사를 군수(郡守)로 바꾸었다. 1895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평양부 개천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이존희, 「조선초기의 수령제도」, 『역사학보』30·31합집,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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