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江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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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수도인 동경의 옛 지명.

개설

현재 일본 동경도(東京都) 중심 지역의 옛 지명이며, 1603년부터 1867년까지 강호막부가 설치되어 일본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한 도시였다. 또한 덕천장군(德川將軍)의 거처였던 강호성(江戶城)이 있었다. 1868년 7월 17일 동경으로 개칭되었다.

명칭 유래

무장국(武藏國)의 국풍(國豊)·임원(荏原) 두 개의 군(郡)과 하총국(下総國)의 갈식군(葛飾郡)과 접해 있는 지역으로 ‘강(江)의 문호(門戶)’, 즉 동경만(東京灣)을 일컫는다는 설과, 근세 시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일비곡(日比谷)의 만 입구라는 지리적 조건에서 유래한 명칭이라는 설 등이 있었다.

형성 및 변천

강호라는 지명이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12세기 말이었다. 강호씨(江戶氏)가 무사단의 하나로 강호 지역을 본거지로 하고 있었다. 중세에는 강호향(江戶鄕)이라는 이름이 기록에 나오는데, 현재의 대수정(大手町) 근처에서부터 동경역(東京駅) 남부에 걸쳐 있는 지역으로 보인다. 실정(室町)시대에 태전도관(太田道灌)이 강호성(江戶城)을 건설하였다. 1590년 덕천가강(德川家康)이 풍신수길(豐臣秀吉)로부터 관동(關東) 지역의 8개국(國)의 관할을 명받아 강호성에 입성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에서 덕천가강이 패권을 장악하고 1603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자 모든 지역의 대명(大名)에게 명령하여 많은 인부를 징발하여 광대한 토지를 조성하였다. 일본교(日本橋) 다리에서 남쪽으로 상인과 직인이 사는 지역이 형성되고 일본교가 각 지역으로 가는 지점이 되었다. 강호성의 정문과 그 주변에는 모든 대명의 저택이 늘어서게 되었고, 대명에게 영지(領地)와 강호에서 1년씩 교대로 정무를 보게 하였던 참근교대(參勤交代) 제도의 실시와 대명의 처자(妻子)에 대한 인질 제도가 실시되면서 강호는 명실상부하게 전국의 대표적인 중심 지역이 되었다. 1633년경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던 강호성의 정비도 완료되었다.

1620~1640년대 강호의 인구는 약 150,000명이었다고 한다. 1657년(효종 8) 강호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도시 전체의 2/3지역이 소실되었다. 막부(幕府)는 도시를 재정비하였고, 점차 시가지가 확대되어 18세기 초기에 인구 1,000,000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1868년 7월 17일 명치천황(明治天皇)의 조서(詔書)에 따라 강호가 동경으로 개칭되고 동경부(東京府)가 설치되었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파견된 회답겸쇄환사가 귀환한 이후부터 막부가 근거지를 강호로 옮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광해군일기』 1년 4월 23일). 일본 측에서 조선의 사절을 덕천가강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새로이 장군에 오른 덕천수충(德川秀忠)과 대면시키기 위하여 강호까지 가도록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1625년(인조 13) 인조가 회답사정립(鄭岦), 부사강홍중(姜弘重), 종사관신계영(辛啓榮)을 인견하여 강호라는 지역에 대하여 확인한 적이 있었다. 인조는 이곳이 일본에서 한쪽 구석인 것으로 보이는데 왜 그곳에 도성을 만들었는지 질문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3년 3월 25일). 이후 조선에서 ‘강호’는 막부가 소재한 곳이자 일본 정치의 중심지를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었다.

조선에서 일본에 보내는 사절, 즉 통신사는 강호까지 가서 막부의 장군을 접견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1811년에는 일본이 강호에서 조선 사절을 영접할 수 없는 사정을 호소하여(『순조실록』 8년 5월 3일) 통신사가 대마도까지만 방문한 역지빙례·역지통신이 있었다(『순조실록』 10년 11월 11일).

관련 기록

『오처경(吾妻鏡)』 『심강가문서(深江家文書)』 『엔각사문서(円覺寺文書)』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吉田茂樹, 『日本地名大事典』, 新人物往來社, 2004.
  • 三省堂編修所, 『日本地名事典』, 三省堂, 2007.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 平凡社地方資料センター, 『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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