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항지소(姜沆之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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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납치되었던 강항이 일본의 정세를 적어 조선 조정에 보낸 글.

개설

임진왜란 직후 일본에 끌려갔던 피로인(被擄人) 중에서 전쟁이 끝난 뒤 조선에 돌아오는 경우가 있었다. 일본은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위하여 피로인을 돌려보내기도 하였고, 일본의 대명(大名)들이 개별적으로 송환을 허락하거나, 피로인이 자발적으로 탈출하여 귀국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은 일본의 재침략을 걱정하고 있었던 만큼 일본의 국교 재개 요청의 진위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조정은 일본의 정세를 확인하기 위하여 피로인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적극 활용하였다. 강항은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일본의 정세를 알렸고, 귀국 후에는 직접 선조를 만나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전하였다. 강항이 제공한 정보는 조선 조정의 대일 정책 수립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 배경

강항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당시 분호조(分戶曹)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남원에 주둔 중인 명군의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남원이 적에게 함락된 후에는 영광에서 의병 모집에 힘썼다. 영광이 함락된 후인 1597년 9월 23일 강항은 논잠포(論岑浦)에서 등당고호(藤堂高虎)군에게 사로잡혔다. 이튿날 그는 무안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다시 체포되었고, 이후 순천 → 진해의 안골포(安骨浦)를 거쳐, 일본의 대마도(對馬島) → 일기(一岐) → 비전(肥前) → 장문(長門) → 적간관(赤間關) 등을 거쳐 장기(長崎)에 상륙하였다가 대진(大津)에 유치되었다. 1598년 5월 25일 강항은 대판(大阪), 이듬해 6월에는 복견(伏見)으로 옮겨졌다. 여러 차례에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한 강항은 이예(伊豫)의 영주를 설득하여 1600년 4월 2일 경도(京都)를 떠날 수 있었고, 5월 19일 마침내 부산으로 돌아왔다.

발단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는 승려를 제외한 사람들은 글을 알지 못하였다. 때문에 피로인 중에서도 글을 아는 양반들은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으며 생활할 수 있었다. 강항 역시 마찬가지여서 일본에서 승려 등 지식인층과 교유하며 일본의 실상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일본에서 생활하던 강항은 1598년 권율(權慄) 장군의 노비였던 김복(金福)을 통하여, 이듬해에는 명인 왕건공(王建功)과 신정남(辛挺南)을 통하여 일본의 정세를 기록한 ‘적중봉소(賊中封疏)’를 조선에 보냈고, 그중 왕건공 편에 부친 글은 조정에 전해졌다(『선조실록』 32년 4월 15일). 이때 조정에 전해진 글은 강항이 친필로 쓴 것이 아니라, 강항이 맡긴 것을 베껴 옮긴 것이며, 강항이 직접 쓴 글은 명인이 보관하였다(『선조실록』 32년 7월 19일).

강항이 올린 상소문의 내용은 『간양록(看羊錄)』의 ‘적중봉서’에 수록되어 있었다. ‘적중봉서’는 자신이 일본에 납치되고 탈출에 실패하여 일본에서 생활하게 된 과정, 일본의 지리와 역사 및 풍속에 대한 설명, 조선을 침범한 일본군 장수의 이름 등으로 구성되었다.

강항은 1582년 향시(鄕試), 1588년 진사시(進士試),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서 급제하였고, 교서관(校書館) 박사(博士), 공조(工曹)와 형조(刑曹)의 좌랑(佐郞) 등을 지냈다. 또 귀국 전 일본에서 글을 보내 일본의 정세를 알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강항의 존재는 조정에 알려졌던 만큼, 귀국 후 즉시 입궐하였고, 선조는 술을 하사하면서 일본의 실정을 물었다. 이때 강항은 일본의 승려 순수좌(舜首座)의 말을 옮겨, 내년 일본이 다시 침략할 것이라 하였으며, 안국사(安國寺)는 일본은 내분 상태인 만큼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는 서계(書契)를 올렸다(『선조실록』33년 6월 9일).

조선에서 철군한 후 일본은 조선에 국교 재개를 요청하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재침략할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은 일본의 정세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일본에서 생활하였던 강항에게 일본의 정세를 확인하려고 하였다. 이항복(李恒福)은 강항이 일본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줄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선조는 그렇지 않을 것으로 여기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3년 6월 15일). 전쟁이 끝난 뒤 조선 조정은 일본에서 귀국한 피로인들을 절개를 잃은 것으로 여기며 낮게 평가하였다. 이러한 시각이 강항에게도 작용하여 그가 제공한 정보를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1600년 7월 병조(兵曹)에서는 강항을 군관으로 차출하여 북쪽 지역 성을 왜성의 형태로 개축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3년 7월 24일). 강항이 제공한 정보를 믿을 수 없다고 여기면서도, 당시로서는 강항이 일본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경과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선조는 강항을 만난 후 관직을 내려 주려고 하였지만 신하들이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선조는 강항의 절의와 글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1602년(선조 35) 승의랑(承議郞) 대구교수(大丘敎授), 이듬해에는 순천교수(順天敎授)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강항은 포로가 되어 죽음으로 절의를 지키지 못한 만큼 자신은 죄인이라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강항이 일본에서 두 차례, 귀국 후 한 차례 글을 통하여 일본의 정세를 알린 것은 조선의 대일 정책 수립에 일정한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일본에서의 견문을 바탕으로 하여 『간양록』을 저술하여 자기가 알고 있는 일본에 대한 정보를 널리 알리려 하였다. 강항은 호남 지역의 관료와 문인들과 교유하였고, 후속 문인들을 양성하였다. 이러한 교류와 정보 전달은 당시대인들이 일본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간양록(看羊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術)』
  • 방기철, 「수은 강항의 일본인식」, 『한국사상과 문화』 57, 한국사상문화학회, 2011.
  • 변동명, 「강항의 필사본 『간양록』 고찰-영광 내산서원 소장본을 중심으로-」, 『아시아문화』 12,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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