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익(姜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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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3년(중종18)~1567년(명종22) = 45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유일(遺逸). 자는 중보(仲輔), 호는 개암(介菴) 또는 송암(松庵)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주거지는 함양(咸陽) 효우촌(孝友村)이다. 승사랑(承仕郞)강근우(姜謹友)의 아들이고, 당곡(唐谷)정희보(鄭希輔)와 남명(南溟)조식(曺植)의 문인이다.

명종 시대 유일 생활

일찍이 당곡정희보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우기를 청하니, 정희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반드시 대유(大儒)가 될 것이다.” 하였다. 몇 년 뒤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과거 시험에 싫증을 느끼고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두었다. 뒤에 남명조식을 찾아가서 유학을 깊이 연구하여 학문이 더욱 진보하였다. 1566년(명종21) 조식의 문하생으로서 경상도 유생 33명을 모아 그가 소두(疏頭)가 되어 성종조의 명유(名儒) 정여창(鄭汝昌)을 신원시켜 달라고 조정에 탄원하였다. 또 유생들에게 서원(書院)을 건립하자는 의견을 내고 사판(祠版)을 봉안한 다음에 봄가을로 유생들을 이끌고 제사를 지냈으며, 나라에 서원(書院)의 정액(旌額)을 하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장고(狀告)를 접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강사상(姜士尙)이 명종에게 유생의 건의를 받아들일 것을 간청하자, 명종이 정여창을 신원(伸寃)시켜 주고, 서원에 ‘남계서원(濫溪書院)’의 편액을 하사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67년 때마침 선조가 즉위하여 재야의 어진 사람들을 조정으로 초청하였는데, 그때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던 덕계(德溪)오건(吳健)이 그를 추천하여 마침내 소격서(昭格署)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 함양(咸陽)으로 돌아갔다. 두류산(頭流山)을 좋아하여 귀동(龜洞)의 산수(山水) 좋은 곳에 땅을 사고 집을 지어서 거기에서 평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으나, 갑자기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45세였다. 1581년(선조14)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개암집(介菴集)』 2권이 있다.

성품과 일화

강익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평이 있다. 강익은 천성이 깨끗하고 밝았으며 도량이 넓고 의연하여, 생각이 깊고 말이 없어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평소에 꼭 닭이 울면 일어나서 낯을 씻고 머리를 빗은 다음에 새벽마다 가묘(家廟)에 알현하였으며, 서재로 나아가서 똑바로 앉아서 책을 읽었는데, 그가 학문을 하는 것은 성실하고 독실했다. 언제나 경전을 읽으면서 또 심오하고 정미(精微)한 부문을 탐구하였는데, 『주역(周易)』과 『예기(禮記)』에 깊이 몰입하여, 비록 글의 뜻이 어렵고 심오하더라도 세밀하게 분석하여 더욱 정성스레 연구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상도 함양 목동(木洞)의 남동쪽 언덕에 있는데,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1642년(인조20) 함양의 남계서원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개암집(介菴集)』
  • 『일두집(一蠹集)』
  • 『동계집(桐溪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연암집(燕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