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운부(江上運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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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에 하역되는 세곡과 각종 물품의 운송역을 지던 공계인.

개설

강상운부는 모민계(募民契)와 함께 중앙으로 올라오는 세곡(稅穀)과 각종 물품을 창고까지 운송하는 일을 맡아 보던 공계인(貢契人)을 일컫는다. 운석계(運石契)라고도 한다. 주로 한강변에 거주하던 자들로, 서울 주변에서 땔감[郊草]을 베어 나르는 역도 담당하였다.

내용 및 특징

『속대전(續大典)』에는 “강상(江上)의 운석(運石), 모민(募民) 양계(兩契)가 국역(國役)을 나누어서 맡는다.”고 하고, “내수사(內需司)의 교초(郊草)는 운석계가 단독으로 운송을 맡고, 선혜청(宣惠廳)과 호조(戶曹) 및 각 관청의 외창(外倉)에 곡물(穀物) 짐을 풀어 내리거나 운반하는 일, 창고에 넣는 일 등은 양계에서 반반씩 나누어 거행한다.”고 하였다.

정부에서는 운송역을 전담하는 강상운부와 모민계의 명부[案]를 두 건씩 만들어 한 건은 한성부에 남겨 두고 한 건은 내수사로 보내어, 마음대로 명부에 올려 주거나 내쫓는 폐단이 없도록 하였다. 1757년(영조 33) 무렵 한성부에서 강상운부를 혁파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당시 강상운부를 모집할 때 송사(訟事)가 빈번하였기 때문이다(『영조실록』 33년 10월 20일).

경강(京江)에 정박된 세미(稅米)를 운반하는 사람에게 후한 품삯을 주었기 때문에 운부인이 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였던 것이다. 이때 호조판서이종백(李宗白)은 한성부의 요구가 옳지 않다는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영조도 결국 파계(罷契)에 대한 요청을 수락하지 않았다.

변천

강상운부는 갑오개혁기에 호조로 재정기구가 단일화되고 선혜청을 중심으로 한 공물 조달 체계가 해체되면서 다른 공계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고동환, 『조선후기 서울 상업 발달사 연구』, 지식산업사, 1998.
  • 오미일, 「18·19세기 새로운 공인권(貢人權)·전계(廛契) 창설운동과 난전활동(亂廛活動)」, 『규장각(奎章閣)』10, 1987.
  • 최주희, 「조선후기 선혜청(宣惠廳)의 운영과 중앙재정구조(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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