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순절(江都殉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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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될 때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청나라 군대에 피살된 이들의 절개와 의리를 가리키는 말.

개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의 남하 속도가 워낙 빨라, 천혜의 피난처로 알려진 강화도로는 정작 국왕과 조정은 몽진하지 못했고, 세자빈과 원손(元孫), 대군, 조정의 일부 원로, 한양 사대부가의 가족들만 피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에 청나라 군대가 도강작전을 통해 총공세를 취했을 때 강화도의 조선군은 이렇다 할 전투조차 전개하지 못했고, 강화도는 청군에게 장악되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일부 조선군 장교와 고위 관료, 그리고 양반가의 가족들이 오랑캐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병자호란 후에 이들을 일컬어 강도순절인(江都殉節人)이라 칭하며 그 절개와 의리를 기렸고, 후손들에게 혜택을 베풀었다.

역사적 배경

고려시대부터 육전에 강한 북방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나라의 종묘와 사직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강화도 피난이었다. 고려왕조가 몽골에 40년 이상 저항할 수 있었던 동력도 도읍을 강화도로 옮겼기 때문이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조선 조정이 후금과 강화를 하면서도 일방적인 항복의 모양새가 아니라 협상에 따른 강화의 형태를 관철시킬 수 있었던 데에도 피난처로서 강화도가 갖는 기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런 강화도였기에, 조선전기 내내 그곳의 방어태세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경험이 병자호란 당시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미 청나라에서도 이 점을 익히 알고 한양과 강화도 사이의 통로를 최대한 빨리 차단하기 위해 급속도로 남하했기 때문이다. 결국 강화도는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 들어온 지 달포 만에 함락되었다. 이때 의리와 절개를 지키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이 많았다.

발단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선과 후금(청) 사이에는 다양한 사안에 따라 긴장이 고조될 때가 많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가급적 후금(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양국 사이의 긴장은 계속 높아졌다. 급기야 청 태종(太宗)이 황제를 칭하고 조선에 대해 군신관계를 요구해오면서 두 나라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청 태종은 1636년(인조 15) 11월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조선이 즉각 응답하지 않자 12월에 바로 대군을 동원해 압록강을 건너 침입함으로써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경과

전쟁 초기의 급박한 상황에서 조선 조정은 우선 종묘의 신주와 왕족들을 강화도로 피난시켰다. 세자빈과 원손을 비롯해 왕자(대군)와 종실(宗室)이 대개 강화도로 피난했고, 일부 관원과 한양 사대부가의 식솔들도 대거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로부터 달포 뒤에 강화도는 청군의 공세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강화성(江華城)이 함락될 때 일부 관료와 장교들은 남문루(南門樓)에서 폭약을 터뜨려 자결했다. 또한 강화성 안의 관아에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내인 세자빈 강씨(姜氏), 그 장남으로서 원손(元孫)인 이석철(李石鐵), 국왕 인조의 차남이자 소현세자의 바로 아래 아우인 봉림대군(鳳林大君), 그 밖의 종실들, 그리고 일부 조정 관원들과 한양 사대부가의 식솔들이 있었는데, 이미 강화성을 돌파해 성내로 진입한 청군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였다. 이렇듯 강화성 함락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자결을 택한 이들과 적병에게 피살된 이들을 ‘강도순절인’이라 하여 조선후기 내내 추모하고 칭송하였다.

기록에 전하는 순절인들 가운데 자결을 택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성이 함락될 때 남문루에 올라가 화약을 터뜨려 폭사한 전우의정 김상용(金尙容), 전 승지 홍명형(洪命亨), 별좌 권순장(權順長), 생원 김익겸(金益兼) 등을 들 수 있고, 사복시 주부 송시영(宋時榮), 사헌부 장령 이시직(李時稷), 돈녕부 도정 심현(沈誢), 전 사헌부 장령 정백형(鄭百亨), 충의 민성(閔垶), 익위사 장령 정백형(鄭百亨) 등은 목을 매 자결했다. 전사하거나 피살된 인물로는 80이 넘은 노구에도 풍전등화의 강화성으로 몸소 들어갔다가 피살된 이상길(李尙吉, 전 판서)을 비롯해, 중군 황선신(黃善身), 부천총 강흥업(姜興業), 부천총 구원일(具元一), 첨사 김득남(金得男), 필선 윤전(尹烇) 등 다수가 있다. 또한 강화도로 피난한 관원이나 사대부가의 가족 가운데 부녀자와 어린이와 노인도 적지 않은 수가 자결했다. 조선사회에서는 이들을 모두 ‘강도순절인’으로 부르며 그들의 절개와 기개를 기렸다.

특히 이들 순절인 가운데 김상용을 비롯해 모두 열다섯 명은 순절인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강화도에 건립된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이 충렬사 15위(位)는 1642년(인조 20)부터 1788년(정조 12)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순차적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 15위 가운데에는 강도함몰(江都陷沒)과 관련이 없는 홍익한(洪翼漢)윤계(尹棨)가 포함되는 등, 18세기 후반에는 강화도 충렬사의 성격이 일부 변질되기도 했다.

참고문헌

  • 『강도사절(江都死節)』
  •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
  • 『병자록(丙子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류재성, 『병자호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6.
  • 이욱, 「조선후기 전쟁의 기억과 대보단 제향」, 『宗敎硏究』 42, 2006.
  •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사 29: 조선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국사편찬위원회, 1995.
  • 허태구, 「병자호란 강화도 함락의 원인과 책임자 처벌」, 『진단학보』113 , 진단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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