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복(姜景福)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762년(영조 38) ~ 1801년(순조 1) = 40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수산나이다. 거주지는 서울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강경복(姜景福)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의 어머니 임숙빈(林肅嬪)이 거처하던 양제궁의 나인이었다. 은언군의 장남인 완풍군(完豊君 : 훗날 상계군(常溪君))이 1786년(정조 10) 역적으로 몰려 죽고 은언군이 강화도로 유배된 이후 양제궁은 역적의 궁이라 해서 ‘폐궁’으로 불렸다. 이 궁에는 은언군의 부인 진천 송씨(鎭川宋氏)송낙휴(宋樂休)의 딸 상산군부인(常山郡夫人)과 그의 며느리인 완풍군의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씨)신오(申◎王+奧)의 딸이 함께 살았다. 이들은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전개하며 주문모(周文謨) 신부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여성 회장인 강완숙(姜完淑) 등과 친분을 맺었다. 그러면서 상산군부인은 자신의 집 나인이었던 강경복에게 천주교 교리를 알려주기 시작하였고, 이후 강경복은 다른 궁녀들과 함께 강완숙의 집에 가서 교리를 배우거나 주문모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정식으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고 더욱 열심히 신앙 생활에 전념하였다.(『순조실록』 1년 5월 22일),[『사학징의』]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피신을 다니던 강경복은 이내 창의문 인근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에 압송되었다.[『사학징의』]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혹독한 고문과 신문을 당한 강경복은 잠시 의금부에서 배교의 뜻을 내비치기도 했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추안급국안』] 결국 그는 사형판결을 받아 그해 5월 2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순조실록』 1년 5월 22일)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한편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

성품과 일화

강경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형조에서의 문초와 신문이 모두 끝난 후 강경복은 “저는 천주교를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양제궁에 살면서도 주문모 신부님을 찾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이 갈수록 굳어져 왔으니 형벌을 당해 죽는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신앙을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했다고 한다.[『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사학징의(邪學懲義)』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1, 2006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