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술양전(甲戌量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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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년(인조 12)에 삼남 지방에 시행된 양전.

개설

갑술양전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연해와 내륙 지역에 개간이 확대되어 은루결(隱漏結)이 늘어나는데도 이를 출세결로 파악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634년(인조 12)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지역을 대상으로 시행한 양전(量田)을 일컫는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후 전란의 피해로 궁궐과 관아는 물론 생활 근거지에서 따로 떨어져 나간 백성들로 인해 국가의 세 수입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중앙에서는 1608년(광해군 즉위)에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을 시작으로 현물공납을 토지세로 전환하는 것을 기본 골자로 하는 대동법 시행 논의가 확대됨으로써 양전의 필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란의 후유증이 얼마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의 세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양전을 시행하는 것은 여러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에 1603년(선조 36)에 시행된 계묘양전은 여러모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인조대에 실시한 갑술양전은 계묘양전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의도에서 1634년(인조 12)에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내용

갑술양전은 1603년에 시행된 계묘양전과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첫째, 계묘양전에서는 수령이 각 읍의 토지를 타량하여 감사를 통해 중앙에 보고하면 양전어사가 내려가 각 고을의 한 면(面)을 뽑아 다시 확인하고 심사하는 복심(覆審) 절차를 밟았다. 반면 갑술양전에서는 각 도에 2명씩 양전사(量田使)를 파견하여 이들이 처음부터 양전을 주관하였다. 양전사로 하여금 타량을 시행하게 한 것은 향촌의 지주층을 통제하는 데 수령보다 양전사가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갑술양전에서는 양전을 감독하기 위해 사족 중에서 선발된 자들을 서로 다른 읍에 배치하여 종사하게 하는 감관환읍제(監官換邑制)를 시행하여 결부 파악을 엄밀하게 행하였다.

셋째, 갑술양전에서는 종래의 6등 전품에 따라 척수를 달리하였던 방식[隨等異尺]에서 벗어나 6개 전품에 동일한 척을 사용하였다. 보통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의 초안을 작성할 때에는 각 필지의 사방 경계를 표시한 사표(四標)와 소유주, 양전 방향, 토지의 용도를 표시하는 지목(地目), 땅의 모양을 기록한 전형(田形), 토지의 품질과 등급을 나타내는 전품(田品), 너비 등을 기록하는 척수(尺數)를 정하는데 이때 척수를 동일한 척으로 하면 타량이 수월하고 관리가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갑술양전에서 주력하였던 지목[起耕田, 陳田, 續田]은 사복시에 속한 목장 개간지와 제언을 일궈 경작한 땅, 그리고 궁가와 아문의 면세지였다. 임진왜란 이후 사적으로 개간한 땅이 양안에 입록되지 않고 그대로 면세지인 은루결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갑술양전에서는 이를 대대적으로 조사하여 세금 징수의 바탕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또 계묘양전 당시 전품을 전반적으로 낮게 책정하였던 것을 감안하여 갑술양전에서는 토지의 전품을 전반적으로 상승시켜 놓았다.

넷째, 계묘양전에서는 민심수습 차원에서 현재 경작할 수 있는 토지인 시기결(時起結)만을 파악했던 것과 달리, 갑술양전에서는 경작하지 않고 오랫동안 묵히고 있는 토지인 진전(陳田)까지 타량하여 양안에 입록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갑술양전에서 파악한 삼남의 전결 총수는 89만 5,489결에 달하였다. 이중 갑술양전으로 새로이 파악한 가경전은 18만 8,695결 수준이었다. 이는 당초 예상보다는 적은 수치였지만, 은루결을 양안에 대거 포함시킨 점에서 당초 취지에 부합하는 성과였다.

변천

본래 양전은 20년마다 다시 타량하여 관련 내용을 기록한 토지대장인 양안을 만들고 각 도와 읍에 보관해 두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1634년 갑술양전을 시행한 후 약 90년이 지난 다음에야 대규모 양전이 재개되었다. 1720년(숙종 46)에 시행된 경자양전(庚子量田)이 그것이다. 경자양전은 갑술양전 당시 파악한 토지에 대해서는 전품을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기재하고, 새로 개간된 토지에 대해서만 사표(四標)와 소유주, 양전 방향, 지목(地目), 전형(田形), 전품(田品), 척수(尺數) 등의 정보를 입록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17세기 이후 수리시설의 확충과 이앙법의 보급으로 토지생산성이 높아졌음에도 기존의 전품을 계승한 조치는 양전에 대한 지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타협책이었다. 이처럼 토지의 생산성이 증대되고 지주와 궁가, 아문의 사적 토지소유가 증가하는 가운데 중앙정부에서 시행하는 양전은 중앙과 지방민들의 갈등과 타협 속에 제한적으로 시행될 수밖에 없었다.

경자양전 이후 1898년 광무양전(光武量田)이 시행되기까지 정부 차원에서 시행한 추가적인 양전은 없었다. 이는 18세기 중반 이후 중앙에 상납하는 전세를 비롯한 대동 상납액이 기본적으로 비총제(比摠制)의 방식으로 책정됨으로써 대규모 행정력을 동원하여 양전사업을 시행해야 할 필요성이 약화되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더욱이 지주제의 발달로 경작지를 실측 조사하여 세금부과 대상 토지인 출세결로 파악하는 정책은 지방민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서는 양전사업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경자양전 이후로는 특정 읍에 한정하여 읍양전(邑量田)이 단속적으로 행해지는 정도로 양전사업은 축소되었다.

참고문헌

  • 한국역사연구회 토지대장연구반, 『조선후기 경자양전 연구』, 혜안, 2008.
  • 김건태, 「갑술·경자양전의 성격: 칠곡 석전 광주 이씨가 전답안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31 , 한국역사연구회, 1999.
  • 오인택, 「조선후기 계묘·갑술양전의 추이와 성격」, 『역사와 세계』 19 , 효원사학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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