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여가(堪輿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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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설에 입각해 묘지나 집터를 정하는 사람.

개설

고대에 감여가는 기상의 변화나 점을 쳐서 길흉을 판단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러나 점차 땅의 형세를 보고 길흉을 판단하여 묘지나 집터를 정하는 풍수가(風水家)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감여는 본래 만물을 포용하며 싣고 있는 물건이란 뜻으로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데, 이 말 역시 풍수의 이칭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에선 감여가를 주로 지관(地官), 지사(地師) 등으로 불렀다.

담당 직무

도성 건물을 신축할 때 터 선정이나 건물의 배치, 도로 운영, 묘지 선정 등의 일에 관여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에 왕실에서는 새로 건축물을 짓거나 묘지를 선정할 때 감여가의 의견을 참조했다. 방위와 지형이 나라와 개인의 길흉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1679년(숙종 5)에는 병조(兵曹) 판서(判書) 김석주(金錫胄)가 도성의 동남쪽에 있던 남소문(南小門)을 폐쇄한 것을 두고, 소양(少陽)의 방위를 막으면 왕자와 왕손의 탄생이 적다는 이유를 들며, 남소문을 다시 개통할 것을 주장하였다(『숙종실록』 5년 6월 29일). 1703년(숙종 29) 북한산성 축조를 두고 조정에서 의견을 주고받을 때, 권상유(權尙游)는 결정의 신중함을 요구하며 감여가의 말은 허황하여 본래 믿을 것이 못 되는데, 그들의 말을 산성 축조 논의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했으나, 숙종은 태조가 나라를 정할 때에도 지사에게 물어서 했으니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숙종실록』 29년 4월 5일). 조선시대에 왕실에서나 민가에서 능원이나 묘의 터를 정하거나 건축을 새로 지을 때 감여가의 의견을 상당 부분 참조했으나, 그것을 절대적으로 따랐던 것은 아니다. 1779년(정조 3) 정조는 자신의 후궁이었던 원빈홍씨(元嬪洪氏)의 묘인 인명원(仁明園)의 자리가 감여가의 말을 따라 정한 것이라고는 하나 자신이 직접 가보니 적당한 자리가 아니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3년 8월 10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