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監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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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시와 진사시의 합칭인 생원진사시의 또 다른 이름.

개설

생원시와 진사시를 합하여 감시(監試)라 불렀다. 감시에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와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증광시가 있었다. 초시와 복시 2차례의 시험으로 합격자를 선발하였다. 초시에는 서울에서 보는 한성시와 각 도별로 보는 향시가 있었다. 초시에 합격해야 서울에서 보는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복시 합격자에게는 백패(白牌)를 수여하였다. 생원시 합격자를 생원, 진사시 합격자를 진사라 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생원진사시를 감시라 부른 것은 고려시대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진사시, 감시라고도 한 데서 연유한다. 국자감시는 1031년(덕종 즉위년)에 처음 실시되어 고려말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2년(태조 1) 7월에 내린 즉위교서(卽位敎書)에서 감시를 혁파(革罷)하였다. 고려말의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데서 오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진사시라고도 하였던 국자감시를 폐지하고 경학 시험인 생원시만 실시한 것이었다.

1393년(태조 2) 진사시를 일시에 없애기 어렵다는 여론에 따라 태조는 진사시를 다시 시행하였다. 그러다가 1395년(태조 4) 과거식(科擧式)을 정할 때에 다시 폐지하고 생원시만 두었다(『태조실록』 4년 12월 7일). 1438년(세종 20)에 사장의 중요성을 들어 진사시를 복구하자는 요구에 따라 다시 실시하여 신숙주(申叔舟) 등 100명의 진사를 뽑았으나(『세종실록』 20년 2월 7일), 1444년 2월에 또다시 폐지하였다(『세종실록』 26년 2월 1일).

진사시 치폐(置廢)는 조선초에 경학을 중요시하는 세력과 제술(製述)을 중요시하는 세력 간의 정치적 대립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논의가 불식되고 진사시가 부활한 것은 1453년(단종 1)이었다. 이후 1894년(고종 31)에 과거제가 폐지될 때까지 진사시는 항상 생원시와 함께 설행되었다. 감시는 입사(入仕)가 목적이 아니라 학문을 장려하기 위한 시험으로 운영되었다. 생원진사시는 원하는 때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할 수 있는 성균관 입학 자격시험의 성격을 갖는다.

내용

생원진사시는 조선초에 간행된 『경국대전』에서부터 고종대 간행된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각 법전에는 생원진사시로 쓰였으나 감시·소과(小科)·사마시(司馬試)라고도 통용되었다. 감시는 진사시가 폐지되었던 조선초 약 60년간은 생원시를 가리켰고, 진사시가 부활된 이후에는 생원시와 진사시를 아울러 지칭하였다.

감시에는 식년감시와 증광감시가 있었다. 식년감시는 3년마다 식년에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시험이었다. 식년(式年)은 자(子)·오(午)·묘(卯)·유년(酉年)을 말하였다. 식년 전해인 상식년(上式年)에 초시를 보고 식년에 복시를 보아 2차례의 시험을 거쳐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였다. 증광감시는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경하하기 위하여 특별히 실시하는 시험으로 시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식년감시와 증광감시는 절차와 방법이 같았다. 시험의 절차는 초시와 복시 2차례에 나누어 실시하였는데 초시의 합격 인원은 생원시와 진사시 각각 700명이며, 복시는 생원시와 진사시 각각 100명이었다. 초시의 정원은 지역차를 감안하였기 때문에 도별로 달랐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한성시는 200명이며, 향시에서 경기도 60명, 경상도 100명, 충청도 90명, 전라도 90명, 강원도 45명, 황해도 35명, 평안도 45명, 영안도 35명이었다. 경기도 향시는 임진왜란 후인 1603년(선조 36)에 폐지하여 한성시에 통합하였다.

복시 전에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고강하는 조흘강(照訖講)에 통과하고 녹명(錄名)을 해야 했다. 최종 합격자인 복시 합격자에게는 왕이 참석하여 거행하는 방방의(放榜儀)에서 합격증서인 백패를 수여하였다.

변천

조선초 약 60여 년간은 진사시가 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감시는 생원시만을 지칭하였으나 1453년 이후에는 생원시와 진사시를 통칭하여 감시라 불렀다.

감시는 제도적으로 큰 변화는 없었으나 합격 인원에서 변화가 있었다. 초시에서 임진왜란 후인 1603년(선조 36)에 경기도 향시를 폐지하고 정원 60명을 한성시에 통합하였다. 복시에서는 100명 정원이 잘 지켜지다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크게 증가하였다. 생원보다는 진사를 더 많이 뽑는 경향이 있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1994.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진사연구』, 집문당,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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