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역관(監董譯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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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왜관 건물의 개·증축 등 수리 공사인 대감동과 소감동을 관장하던 왜학 역관.

개설

조선후기 왜관 내에서 이루어지는 왜관 건물의 수리 공사를 담당하던 조선 측 역관으로 당상관이 임명되었다. 1607년(선조 40)에 설치된 두모포 왜관은 입지 조건상 결함이 많아 대마도는 일찍부터 조선 측에 왜관 건물의 개축과 증축을 요구하였다. 왜관 공사에서 감동역관이 언제부터 임명되고 활동하였는지는 기록에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17세기 중반 일본 측의 요구로 왜관 수리가 이루어지면서 왜관 건물의 수리를 감독하는 감동역관이 임명된 것으로 짐작된다.

왜관 건물의 수리 공사는 동관과 서관 전체를 수리하는 대감동(大監董)과 화재로 소실된 가옥을 재건하거나 부분적인 보수를 하는 소감동(小監董)으로 나누어졌다. 왜관 수리가 있을 때, 감동역관은 왜관 건물의 수리할 곳을 살피고 공사에 필요한 비용의 책정, 공사비 소요 정도의 일차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담당 직무

조선 정부는 왜관 내 건물이 불타거나 훼손되었을 때 조선 측이 지어 준 건물의 수리에 필요한 모든 물자와 비용을 조달하였다. 초량왜관의 경우 습기가 많은 해변에 위치하여 연중 바닷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 건물이 심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왜관에서는 25년마다 동관과 서관 전체를 수리하는 대감동(大監董)과 화재로 소실된 가옥을 재건하거나 부분적인 보수를 하는 소감동이 시행되었다. 대감동에는 당상역관 3명과 당하역관 3명, 소감동에는 당상역관·당하역관 각 1명이 공사의 전 과정을 총괄하여 감독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감동역관이라고 하였다.

왜관의 수리는 매달 초하루가 되면 동래 부사는 훈도와 별차 및 감동역관으로 하여금 왜관을 순시하게 하였다. 건물이 썩거나 무너진 곳이 있으면 훈도와 별차는 그 상황을 문서로 작성하여 동래 부사와 부산첨사에게 보고하였고, 일본 측의 요청에 따라 수리해 주었다(『숙종실록』 3년 2월 12일). 또한 대마도 측[관수 또는 재판]이 왜관 건물의 수리를 요청해 올 경우에도 경상도 부사의 군관과 다대포 첨사, 부산진 군관이나 감동역관 및 훈도와 별차 등을 파견하여 그 실태를 조사하게 하였다. 공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중앙정부에 허가를 요청한 후, 허가가 내려오면 감동역관이 작성한 소요 물품 및 비용에 대한 견적서를 경상도 부사을 거쳐 조정에 올렸다. 또한 훈도 및 별차와 일본 측의 통사가 협의하여 수리에 필요한 비용과 시기를 결정하였다.

감동역관들은 조선이 부담해야 하는 왜관의 개·증축, 이관 비용 등을 고리대[殖利]를 통하여 조달하기도 하였다. 이 고리대의 자본으로는 공무역으로 수출하기 위하여 비축된 공목(公木), 공작미(公作米), 대출한 관화(官貨) 등이 이용되었으며,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는 사전(私錢)을 대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리 비용의 조달 방식은 왜관을 수리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동시에 역관의 사재(私財)를 증식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왜관수리등록(倭館修理謄錄)』
  • 『춘관지(春官志)』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변례집요(邊例集要)』
  • 장순순, 「조선 후기 왜관 변천사 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 정예정, 「초량 왜관의 조영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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