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의(簡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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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이천(李蕆)과 장영실 등이 혼천의를 간편하게 개량해 만든 천문기기.

개설

세종대 이천과 이순지(李純之) 등은 세종의 명을 받아 원나라곽수경(郭守敬)이 제작한 천문기기인 간의(簡儀)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간의는 종래 사용하던 혼천의를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혼천의는 적도경위의와 지평경위의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관측자의 눈을 가려 관찰하기 불편하였으나, 간의는 지평경위의와 적도좌표계를 분리하여 관측 결과를 편리하게 읽을 수 있었다. 간의라는 이름은 혼천의를 간단하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간의는 종전의 천문기구에 비하여 매우 크고 정밀한 천문기기였다.

연원

간의는 중국이나 동아시아에서 오랜 기간 사용해왔던 관측기구인 혼천의를 간편하게 개량한 천문기기이다. 원나라의 곽수경이 혼천의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1276년 설계, 제작하여 1279년에 완성하였다.

혼천의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관측기구이나, 제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구로 활용되어 관측 용도로 불편함이 많았다. 이것을 대폭 개량하여 관측 용도에 맞게 만든 것이 곽수경의 간의이다. 원나라 때는 이슬람 천문학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 무렵 이슬람 지역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던 관측기구인 토르퀘텀(Torquetum)이 중국에도 들어왔고, 곽수경은 이 토르퀘텀의 영향을 받아 간의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432년(세종 14)에 이천과 장영실 등이 『원사(元史)』에 있는 곽수경의 간의를 근간으로 만든 것이 최초이다. 세종은 이천과 이순지 등에게 목제로 간의를 만들게 했고, 이것이 성공하자 이를 구리로 주조하게 하였다.

내용 및 특징

혼천의는 적도경위의와 지평경위의라 불리는 환 등 여러 개의 둥근 환이 있어 복잡하고 이 둥근 환들이 관측자의 눈을 가리기 십상이었다. 천문을 묘사하는 데 있어 황도가 중심인 서양과 달리 동양은 적도가 중심이었다. 따라서 천문도나 천문기기는 모두 적도좌표계[Quatorial system]를 사용했다.

곽수경은 지평경위의와 적도좌표계를 분리하여 천체를 읽을 수 있는 간의를 만들었다. 간의는 혼천의를 간단하게 만들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곽수경의 간의는 종전의 천문기구에 비하여 그 크기가 매우 크고 정밀하다. 천문기구는 크면 클수록 정밀하게 관측할 수 있었다.

조선 세종대 경복궁에 설치했던 간의는 대간의와 소간의로 나뉘는데, 대간의는 『원사』에 실린 곽수경의 방법에 의하여 만들었다. 간의의 구조는 혼천의에서 적도 좌표계와 지평 좌표계를 분리해내어 관측하기에 편리하도록 구조를 변경시켰는데, 간의를 구성하는 부품과 기능은 다음과 같다.

〈간의의 부품과 기능〉

간의를 구성하는 후극환과 사유쌍환, 규형, 적도환, 백각환, 계형 등은 적도의식 장치로 간의의 남쪽 윗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사유쌍환은 360도 회전하면서 천체들의 거극도를 측정하는 데 사용한다. 지평의식 장치로 간의 북쪽 밑부분에 위치하는데, 천체의 지평고도를 알려주는 입운환과 24방위를 알려주는 지평환, 천체를 관측하는 망통인 규형이 지평의식 장치의 부품이다.

우리나라에서 간의는 1432년(세종 14)에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나무로 이를 만들어 보게 한 다음 이를 근거로 구리로 간의를 주조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흔히 대간의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것 이외에도 여러 차례 작은 규모의 소간의도 제작하여 사용했다.

세종은 1432~1433년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간의대를 크게 만들어 그 위에 지름 2m가량의 대간의를 설치했다. 이 대간의는 높이 31자, 너비 32자, 길이 47자의 큰 규모로 되어 있었는데, 돌로 쌓은 단 위에 대간의를 설치했고 그 방향을 바로잡기 위한 정방안도 함께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이를 사용하여 매일 밤 5명의 천문관이 하늘을 지키고, 특별히 이상한 하늘의 조짐이 발견되면 즉시 임금에게 보고하게 했다. 또 급하지 않은 관측 결과는 기록해서 다음 날 보고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소간의는 구리로 밑바탕을 만들어 가장자리에 물홈을 둘러서 남북 자오선을 맞추고, 바닥의 수평을 유지한다. 적도환의 면에는 주천도(하늘의 둘레) 365도 1/4로 나누어서 동서로 움직이게 하면서 7정(七政), 즉 일월오성과 여러 별자리의 입수도분(入宿度分)을 측정하였다.

100각 환은 적도환 속에 있는데, 그 면을 12시를 100각으로 나누어 낮의 시간은 백각환(해시계)으로 알고, 밤의 시간은 기준별, 즉 중성(中星)으로 정하였다. 사유환에는 규형이 있어서 동서로 돌고, 남북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어서 규형으로 관측할 수 있다. 경회루 북쪽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었는데, 높이가 31척, 길이가 47척, 너비가 32척이며, 돌로 난간을 둘렀는데, 그 꼭대기에 간의를 놓고, 간의의 남쪽에는 정방안을 놓았다.

변천

우리나라에서는 1432~1433년에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간의대를 세워 대간의를 설치하는 외에 휴대에 편리한 소간의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명나라에서도 원나라 때의 천문기구를 복구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1437년에 간의를 비롯한 기구들이 황보중화(皇甫仲和)에 의하여 제작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세종대의 간의는 없어지고 그 부품조차 남아 있지 않다. 간의는 경복궁 안에 있는 간의대 외에도 한양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있었던 서운관(書雲觀)의 간의대에도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창경궁 안의 간의대에도 설치되었으나, 간의는 사라지고 그 유적만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중국에도 원의 곽수경이 만든 것은 없다. 현재 북경에 있는 것은 서양 선교사가 청나라 초기에 만든 것인데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 곽수경의 간의를 녹여서 썼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20톤 가까이나 되는 구리를 따로 구한다는 일이 쉽지 않아서 전대의 것을 녹여서 새로 만들 때 다시 쓰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간의는 이천과 장영실이 만들었지만, 실제 이를 사용한 사람은 역법을 담당한 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이었다. 혜성이나 객성이 출현하는 등 하늘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그들은 예외 없이 간의로 관측했다(『세종실록』 20년 1월 7일).

참고문헌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남문현, 「혼천의, 자격루, 측우기」, 『한국사시민강좌』23, 1998.
  • 남문현, 『장영실과 자격루』, 서울대출판부, 2002.
  • 이은성, 『역법의 원리분석』, 정음사, 1985.
  • 전상운, 『세종문화사대계』2,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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