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화사(覺華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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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태백산사고를 수호하던 절.

개설

각화사(覺華寺)는 고려 무애지(無㝵智) 국사(國師)계응(戒膺)이 창건하였다. 계응은 대각(大覺) 국사(國師)의천(義天)의 법을 이어받았고, 개경에서 교화하다가 말년에 태백산으로 들어가 각화사를 창건하였다. 그 이후 각화사와 관련한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조선후기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의 건립과 더불어 다시 나타난다. 각화사는 태백산에 사고가 건립되어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된 1606년 이후 각화사의 주지가 수호총섭(守護摠攝)이 되어 수직승도(守直僧徒) 39명을 통솔하였으며, 각화사의 승려들은 태백산사고의 수직(守直)을 제외한 다른 잡역을 면제받았다.

연원

각화사의 창건주인 계응은 대각 국사의천의 문도직명(門徒職名)에 삼중(三重) 대사(大師)로 실려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절에서 지내면서 독서를 했는데, 대각 국사가 계응의 책 읽는 소리를 담장 너머에서 듣고 장차 훌륭한 승려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출가를 권해 문하에 두었다. 그는 대각 국사의 법을 이어받고, 40여 년 동안 왕 곁에서 교화하였다. 말년에 여러 차례 청하여 태백산으로 들어가 각화사를 창건하였다. 계응이 각화사를 창건한 이후에는 각화사와 관련해 더 이상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각화사 인근에 각화사의 전신인 남화사지(覽華寺址)가 있다. 이 절은 원효가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래서 각화사의 창건주로 원효를 비정하고, 계응을 중창주로 보기도 한다.

내용 및 변천

(1) 태백산사고

각화사에 대한 기록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조선후기 태백산사고가 건립된 이후부터이다. 태백산사고는 1605년(선조 38) 10월 경상감사유영순(柳永詢)이 태백산의 입봉(立峰) 아래 깊숙한 곳이 사고지(史庫址)로서 적당하다고 보고하자,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여 공사에 착수하였다(『선조실록』 38년 10월 13일). 1606년(선조 39) 4월에 사고를 완공하고 임진왜란 이전의 실록을 새로 인쇄한 신인본(新印本) 1질을 봉안하였다(『선조실록』 39년 5월 7일). 그런데 1634년(인조 12)에 대교(待敎)유황(兪榥)이 태백산사고의 위치가 물이 빠질 수 없는 수렁에 있어서 기둥이 무너졌다고 보고하고 1리쯤 떨어진 서운암(棲雲庵) 뒤에 새로 지을 만한 곳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예조(禮曹)와 춘추관(春秋館)에서 임금에게 사고를 옮겨 세울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인조실록』 12년 3월 20일). 그 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태백산사고는 서운암 부근 현재의 위치에 옮겨지었다.

조선전기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장소로, 내사고(內史庫)와 외사고(外史庫)가 있었다. 내사고는 서울에 있는 춘추관을 말하고, 외사고는 충주사고·성주사고·전주사고를 말한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세 곳의 실록이 모두 소실되었다. 전주사고본은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참봉오희길(吳希吉)이 태인현의 선비 손홍록(孫弘祿)과 안의(安義) 등과 함께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옮겨 보관함으로써 전란의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하여 1606년(선조 39)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3부를 새로 제작함으로써 전주사고본과 교정본을 합쳐 모두 5부의 실록을 갖추게 되었다. 조정은 『조선왕조실록』의 제작과 더불어 보관할 장소를 찾기 위해 경기도·강원도·경상도감사에게 사고 후보지를 조사하도록 지시하여 알맞은 입지를 물색하였다. 이렇게 하여 최종 후보지로 선정된 곳이 강원도 오대산, 경상도 태백산, 강화도 마니산, 평안도 묘향산이었다. 춘추관에는 새로 제작한 신인본(新印本)을 보관하고, 마니산사고에는 전주사고의 원본, 오대산사고에는 교정본, 태백산사고와 묘향산사고에는 신인본을 보관하였다.

춘추관의 『조선왕조실록』은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모두 소실되었고, 이후로는 춘추관에 사고를 두지 않았다. 묘향산사고는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고를 북방에 두는 것을 불안하게 여긴 조정 대신들의 건의에 의해 폐지되고, 무주 적상산에 새로 사고를 짓고, 묘향산사고본을 1618년부터 1633년까지 모두 옮겼다. 적상산사고본은 일제강점기에 장서각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때 북한이 가져갔다. 마니산사고본은 1636년 병자호란으로 피해를 입은 후 1660년(현종 1)에 정족산사고에 옮겨 보관하였으며, 현재는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태백산사고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634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으며, 그곳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옮겨 보관하다가 현재는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보관하고 있다. 오대산사고본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반출되어 동경제국대학에서 보관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일부만이 남았다고 한다.

(2) 각화사와 수직승도

외사고는 사고를 지키는 수호군(守護軍)이 있었지만 실질적인 수직(守直)은 인근의 사찰이 맡았다. 오대산사고는 월정사, 묘향산사고는 보현사, 적상산사고는 안국사, 정족산사고는 전등사가 수직(守直)을 담당하였다. 태백산사고는 1606년(선조 39)에 건립된 이후 각화사 승려들이 사고를 지키는 수직승도(守直僧徒)가 되었고, 그 주지가 수호총섭(守護摠攝)으로서 통솔하였다. 수직승도는 각 사고마다 4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다른 잡역(雜役)을 면제받았다. 즉 한번 수직승도로 정해지면 영구히 그 임무만 수행하도록 하는 영정(永定)과 사고의 수직에만 전념하도록 하는 전책(專責)의 원칙이 있었다. 하지만 이 원칙이 때로는 지켜지지 않아 문제가 되기도 했다.

수직승도의 임무는 사고 건물의 안전 및 손상 유무를 점검하는 것과 상시적인 순찰을 통해 사고 내 소장품의 도난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사고를 열고 들어가서 소장된 서적들을 점검할 수 있는 권한은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에게만 있었으므로 수직승도들은 건물을 관리하고 도난을 방지하는 임무만을 맡았다. 그 외에 사고 건물의 수리로 인해 서적을 옮기거나 소장 서적들을 꺼내 습기를 제거하는 포쇄(曝曬)를 하는 것도 수직승도들의 중요한 임무였다.

조정은 수직승도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태백산사고의 수직을 맡은 사찰에 사위전(寺位田) 2결(結)을 지급하였다. 또한 사고의 수직승도에게는 별도로 관원에게 급료로 주는 쌀인 요미(料米)를 지급한 경우도 있었다. 1811년(순조 11)에 비변사(備邊司)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오대산·적상산·정족산사고의 수직승도에게 요미를 지급했더라도 지난 몇 년 동안 각화사 수직승도에게는 지급하지 않았으므로 갑자기 요미를 지급할 수 없다고 하였다(『순조실록』 11년 3월 30일). 이 기록으로 볼 때 수직승도들에게 별도의 요미를 지급한 곳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태백산사고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왕조실록』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옮김으로써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에 따라 각화사의 수직승도들도 그 임무를 마치게 되었고, 태백산사고는 해방 이후 소실되어 현재 빈터만 남아 있다. 반면에 각화사는 1926년에 승려 달현(達玄)이 법당을 중건하였고, 1970년에 승려 금오(金烏)가 요사채를 중건하는 등 전통 사찰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 『파한집(破閑集)』
  • 『계제사등록(稽制司謄錄)』
  • 「태백산인계응(太白山人戒膺)」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강문식, 「조선후기 오대산사고의 수직승도 운영」, 『동국사학』57, 동국대학교 사학회, 2014.
  • 김기태, 「조선사고의 역사적 변천에 관한 연구」, 『기전문화연구』29·30합집, 경인교육대학교 기전문화연구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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