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집람(家禮輯覽)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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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가례집람 |
한글표제 | 가례집람 |
한자표제 | 家禮輯覽 |
분야 | 예서 |
유형 | 문헌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숙종 |
집필자 | 성낙수 |
저편자 | 김장생 |
간행처 | |
간행년일 | 1685 |
권책수 | 10권 6책 |
소장처 | 규장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가례집람(家禮輯覽) |
조선 중기의 학자 김장생(金長生)이 1599년 주희(朱熹)의 『가례(家禮)』를 증보, 해설한 책.
개설
김장생은 주희(朱熹)의 『가례(家禮)』의 내용 가운데 현실과 맞지 않는 사례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예절의 내력과 후세의 여러 해석에 일관성이 있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만년에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1685년(숙종 11)에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의 노력으로 간행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김장생은 서문에서 “내 어려서부터 『가례』를 배우고 익혔으면서도, 그 내용을 훤히 꿰뚫어 알지 못하는 것을 늘 안타깝게 여겼다. 기존 신의경이 엮은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따르며 연구하고, 더불어 강론한 것들이 해가 지나면서, 실마리가 쌓였다. 또한 사문의 스승들을 찾아뵙고, 여쭈어 바로잡으니, 드디어 얼추 그 대강과 개요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사문의 여러 대가들의 학설을 취합하고, 해설을 모으고 요점을 간추려서, 각 조목 아래에다 붙였다. 그걸 엮어보니, 책 한 권이 되어 제목을 『가례집람』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서지 사항
10권 6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세로 31cm, 가로 21cm이며,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가례』의 본문을 중심으로 하고, 예서(禮書)의 고전과 관련된 여러 학자의 학설을 주석으로 삼아서 완성한 『가례집람』은 권1은 통례(通禮), 권2는 관례, 권3은 혼례, 권4∼9는 상례, 권10은 제례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장생은 『가례집람』 이외에도 『의례문해(疑禮問解)』ㆍ『개장의(改葬儀)』ㆍ『제의정본(祭儀正本)』ㆍ『예기기의(禮記記疑)』 등의 예절에 관한 글들을 남겼는데, 이러한 저술들은 김장생이 예학의 본원을 추구하고, 사례(四禮) 중에서도 절차에 문제가 많은 것들을 고찰하기 위해 집필한 것이다. 이런 연구 성과는 모두 『가례집람』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한 『가례집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장생과 많은 학문적 대화를 가졌던 신의경(申義慶)의 연구 성과도 빼놓을 수 없는데, 그의 『상례비요(喪禮備要)』는 김장생의 상례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참고하는데 도움을 주는 도설(圖說)을 붙인 것이 특색의 하나이며, 보충한 여러 유학자들의 설에 대해서는 모두 인용한 책이름을 적고, 편목(篇目)을 밝혔으며, 자신의 의견일 경우에는 ‘우(愚)’자나 ‘안(按)’자를 써서 분명히 했다.
의의와 평가
김장생은 이 책에서 시의에 맞지 않는 주희(朱熹)의 『가례』를 수정 보완하였으며, 여기에는 조선의 현실에 적합한 예론을 정립하고, 양란의 후유증을 예로써 극복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즉 주희의 『가례(家禮)』를 미완성으로 간주하고, 여러 예기의 학설을 모아 조목별로 해석하여 보충했을 뿐만 아니라, 책머리에 도설(圖說)을 실어, 고금의 의물(儀物)을 징험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 현실에 적합한 예론 정립에 있으며, 시의성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송나라 때 만들어진 예서(禮書)가 3세기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조선에서 그대로 유효할 수는 없다는 인식 하에 조선에 맞는 예서를 만들어 낸 것이다. 16세기 조선의 사림은 상례와 제례를 행할 때 『주자가례』를 조금씩 자신의 가문이나 현실에 맞게 수정하거나 보완하였으므로, 조선적 예서는 시대의 요구이자, 사회의 요구였다. 김장생의 『가례집람』은 가가견문(家家見聞)으로 쏟아져 나오는 예서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양란의 후유증을 예로서 극복해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이 책은 그 뒤 가례의 연구에는 물론, 사례(四禮)의 행용에서 늘 참고해야 하는 기본 예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특히, 예경(禮經)의 정신과 가례의 원칙, 시속(時俗)의 변례(變禮)를 상고하는 것은 물론, 가례를 시행할 때 발생하는 시비를 판단하는 데 있어 권위 있는 준칙으로 활용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의 학계와 사상계에 미친 김장생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고, 그의 예학이 권위적인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영애, 「가례집람에 따른 대전ㆍ논산지역 예학자 가옥의 공간구조 분석」, 대한건축학회, 2007.
- 김영자, 「전통상복의 구조와 형태에 관한 연구」, 『한경대학교 논문집』, 1988.
- 조영숙, 「사계 김장생의 예학사상 연구: 『가례집람』「혼례편」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 조준하, 『가례와 가례집람의 현대적 가치』, 한국동양철학회, 2002.
- 최배영, 「가례서를 통해 본 혼례관 연구: 가례. 가례집람. 사례편람을 중심으로」,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