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태실지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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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태실은 1458년 아기태실로 처음 조성되었다. <ref>『成宗胎誌石』, 1458, 皇明天順元年七月三十日戌時生 懿敬世子男慶新胎 天順二年三月初一日戊子子時藏.</ref> | 성종 태실은 1458년 아기태실로 처음 조성되었다. <ref>『成宗胎誌石』, 1458, 皇明天順元年七月三十日戌時生 懿敬世子男慶新胎 天順二年三月初一日戊子子時藏.</ref> | ||
− | 초안지는 경기도 광주부 경안역(慶安驛) 뒤로<ref>『正祖實錄』 8년(1784) 9월 15일 정묘, 成宗大王胎封廣州 慶安驛後.</ref> 가봉은 1471년에 이루어졌다. | + | 초안지는 경기도 광주부 경안역(慶安驛) 뒤로<ref>『正祖實錄』 8년(1784) 9월 15일 정묘, 成宗大王胎封廣州 慶安驛後.</ref> 가봉은 1471년에 이루어졌다. 1578년, 1625년, 1823년에 걸쳐 태실비가 개수된 사실이 『성종대왕태실비』에 기록되어있어 성종 태실이 지속적인 관리를 받아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
1928년 9월경 이왕직에서는 전국의 태실을 체계적 관리하겠다는 명목으로 서삼릉으로 이안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성종태실과 태실비를 창경궁 내로 이전하였다. 그 이유는 역대 국왕의 가봉태실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이 성종태실이기에 이를 옮겨 향후 조성할 서삼릉 태실의 표본으로 삼고 연구 자료로 활용하기 위함이라 선전했다.<ref>「新設할 標本은 成宗의 胎室」,《매일신보》, 1928년 9월 10일.</ref><ref>나각순, 『창경궁과 문묘』, 종로문화원, 2005, 138~139쪽.</ref> 하지만 실제 서삼릉 이안지에는 이왕직의 선전과 달리 태주의 이름과 초안지 주소, 건립연도만을 단순히 기입한 표석비를 다수 조성해 이를 나열하여 태실이 가졌던 역사경관적 의미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 1928년 9월경 이왕직에서는 전국의 태실을 체계적 관리하겠다는 명목으로 서삼릉으로 이안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성종태실과 태실비를 창경궁 내로 이전하였다. 그 이유는 역대 국왕의 가봉태실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이 성종태실이기에 이를 옮겨 향후 조성할 서삼릉 태실의 표본으로 삼고 연구 자료로 활용하기 위함이라 선전했다.<ref>「新設할 標本은 成宗의 胎室」,《매일신보》, 1928년 9월 10일.</ref><ref>나각순, 『창경궁과 문묘』, 종로문화원, 2005, 138~139쪽.</ref> 하지만 실제 서삼릉 이안지에는 이왕직의 선전과 달리 태주의 이름과 초안지 주소, 건립연도만을 단순히 기입한 표석비를 다수 조성해 이를 나열하여 태실이 가졌던 역사경관적 의미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