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녀 영수 태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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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왕녀 영수 태실(燕山君 王女 靈壽 胎室)
연산군 왕녀 영수 태실 추정지 공중 전경
식별자 PC031
분류 왕자공주 태실
한글명 연산군 왕녀 영수 태실
한자명 燕山君 王女 靈壽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Princess Yeongsu
피안자 명칭 영수(靈壽)
피안자 이칭 미상
피안자 부 연산군(燕山君)
피안자 모 숙용 장씨(淑容張氏)
피안자 생년월일 1502 추정
피안자 몰년월일 미상
안태 연월일 1502.11.12
안태지 좌표(위도) 37°70'69.51"N
안태지 좌표(경도) 127°16'05.76"E
안태지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안 연월일 1929.05 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王女靈壽胎,弘治十五年,十一月十二日,藏于楊州郡榛接面,昭和四年,月,日移藏
지문 찬자 이왕직 예식과(李王職 禮式課)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태항아리 왕자 왕녀 영수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내용

연산군과 장녹수로 알려진 숙용 장씨의 소생이다.

《연산군일기》에 다수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연산군이 아꼈던 딸임을 알 수 있다.

지석의 내용에 따르면 1502년(연산군 8) 11월 12일 양주군 진접면에 태실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에는 성종의 왕자 수장의 태실이 있는 지역으로 태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지역은 순강원 우강(右岡)과 제3062부대라 한다.

상세

연산군(燕山君) 왕녀 영수(靈壽)의 태실은 이왕직에 의해 전국의 태실이 서삼릉으로 이안되는 과정에서 그 정확한 위치를 잃어버렸다.

성종 왕자 수장의 태실과 함께 내각리에 위치한 두 태봉 중 하나가 영수의 태실로 추정되고 있다.

영수는 장녹수(張綠水)로 널리 알려진 숙용 장씨(淑容張氏) 소생으로[1] 그 자세한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유년기에 염질(染疾)이나[2] 천연두(痘瘡)에 걸리는 등[3] 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졸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47권, 연산군 8년(1502) 12월 8일 병오(丙午)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상참을 받고 경연에 납시니, 지평(持平) 권주(權轃)가 이뢰기를,

"전자에 ‘장례원(掌隷院)의 종 종이(從伊)를 동평관(東平館)일본 사신의 유숙소의 고직(庫直)으로 영원히 정(定)하라.’고 명하셨는데, 이것은 이익이 있는 자리로서 사람들이 다투어 맡고자 하므로, 만약 오래 유임시키면 국가에서 금지하는 물품을 사사로이 서로 매매하여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이오니, 자주 바꾸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종이는 곧 치원(致元)의 아내 석비(石非)의 아들이다. 왕이 녹수(綠水)를 총애해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을 영수(靈壽)라고 했다. 왕이 이를 매우 사랑했는데, 석비는 영수의 유모(乳母)인 까닭으로 이 전교가 있게 된 것이다.

受常參, 御經筵。 持平權輳曰: "前者命以掌隷院奴從伊永定東平館庫直, 此有利之役, 人爭欲之。 若久任則國家所禁之物, 私相買賣, 必有弊矣, 莫若數遞之爲便。" 從伊乃致元妻石非子也。 王嬖綠水生一女, 名曰靈壽, 王愛之甚。 石非 靈壽乳母, 故有是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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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47권, 연산군 8년(1502) 12월 8일 병오(丙午)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59권, 연산군 11년(1505) 9월 4일 을유(乙酉)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명하여, 의원(醫員) 박계선(朴繼善)에게 1자급(資級)을 더하게 하고, 은대(銀帶)를 내렸다.

장 숙용(張淑容)의 딸 영수(靈壽)가 마침 염질(染疾)되었는데, 계선으로 하여금 고치게 하여 나았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다.

命加醫員朴繼善一資, 賜銀帶。 張淑容之女靈壽。 適染疾, 今繼善治之得愈, 故有是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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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59권, 연산군 11년(1505) 9월 4일 을유(乙酉)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61권, 연산군 12년(1506) 3월 21일 신축(辛丑)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영수(靈壽) 아기가 구수영(具壽永)의 집에 있으면서 천연두[痘瘡]가 차차 나아가니, 수영에게 쌀 50석과 안장을 갖춘 말 한 필을 내리라."

하였다.

傳曰: "靈壽阿只, 在具壽永家, 痘瘡向瘳, 其賜壽永米五十碩, 鞍具馬一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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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61권, 연산군 12년(1506) 3월 21일 신축(辛丑) 3번째 기사



조선의 태실

『조선의 태실』2권, 「28.壽長 (추정 鳳安君)」

Quote-left blue.png 서삼릉의 왕자 수장의 태실은 그 태비에 의하면 이전된 곳이 연산군의 왕녀 영수(靈壽)와 마찬가지로 양주 진접면이다. 지금 진접면 내각리애는 여러 노인들의 증언대로 일제시대 서울로 태가 옮겨진 뒤 폐허로 남은 왕실의 태를 묻었던 두 태봉이 있다.

그 하나는 순강원(順康園)의 좌강(左岡)이고, 다른 하나는 제3062부대 내의 배나무골에 자라잡고 있다. 이 두 태봉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왕자 수장의 태실이 있던 곳이다. 이 두 태봉에는 서울로 태를 모셔간 이후에도 한 동안은 태비가 남아 있었다. 두 태비 가운데 순강원 좌강의 태비는 배나무골의 태비와 달리 갓 갓이란 비두(碑頭)를 가리킴 이 있었다 한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매몰되어 자취가 묘연하다. 결국 수장 왕자의 태(胎)가 내각리 어느 태봉에 장테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성종대왕 왕자 가운데 1482년생은 봉안군 그리고 견성군이 있다. 이 가운데 견성군은 태지에서 보듯 1482년 5월 5일생이다. 따라서 수장 왕자는 봉안군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 성종대왕 왕자들의 족보인 선릉왕자 14파합보소(宣陵王子十四派合譜所) 간행 『전주이씨족보(全州李氏族譜(1930년)』에는 봉안군의 탄생이 1482년 9월 29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수장은 봉안군일 가능성이 더욱 높게 된다. 하지만 수장은 봉안군도 아닌 일찍 세상을 뜬 왕자일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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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의 태실』2권, 「28.壽長 (추정 鳳安君)]


『조선의 태실』2권, 「54.靈壽 (燕山君 王女)」

Quote-left blue.png 이왕직에 의하여 서삼릉에 태를 옮겨 세운 왕녀 영수의 태실은 태비의 명문을 통하여 볼 때 본래 위치가 왕자 수장과 마찬가지로 양주 진접면이다. 이 진접면에 왕실의 태를 묻었던 태봉은 두 곳이 있는데 이에 관하여는 앞에 壽長王子(추정 鳳安君) 태실에서 언급하였다. 결국 두 태봉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왕녀 영수의 태실이 있었던 곳이다.

( …중략 …) 영수는 숙용 장씨의 소생으로서 연산군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왕녀임을 알 수 있다. 연산군의 다른 왕녀들이 대개 태어난 당년에 태실을 만든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이 왕녀는 1502년에 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요절한 연산군 왕자녀 중에서 이 영수왕녀는 적어도 11살까지는 생존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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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의 태실』2권, 「54.靈壽 (燕山君 王女)」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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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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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

1.고문헌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조선의 태실 2』, 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99.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

주석

  1. 『燕山君日記』 8년(1502) 12월 8일 병오, 王嬖綠水生一女 名曰靈壽.
  2. 위의 책, 11년(1505) 9월 4일 을유, 命加醫員朴繼善一資 賜銀帶 張淑容之女靈壽 適染疾 今繼善治之得愈 故有是命.
  3. 위의 책, 12년(1506) 3월 21일 신축, 傳曰 靈壽阿只 在具壽永家 痘瘡向瘳 其賜壽永米五十碩 鞍具馬一匹.